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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있는 벗기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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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하반기 한국 연극계의 최고 화제작은 단연 ‘논쟁’(임형택 각색·연출)이다. 8월 말 처음 무대에 오른 연극은 2차 연장까지 이어 가며 대박을 터뜨렸다. 평균 객석 점유율 120%. 보조석도 모자라 입석 관객까지 있었다는 후문이다. 검색어 1위에도 여러 번 오르내린 이 연극이 뜨거웠던 건, ‘알몸 연극’이기 때문이다.

평소 에로물에 대해 매니어적 취향을 보이던 ‘까칠한 무대’가 이런 공연을 놓칠 수 없을 터. 당연히 보러 갔다. 배우의 벗은 몸이 궁금해 달랑 혼자 객석에 앉은 남자의 모습이라니. 그런데 나 같은 관객, 꽤 있었다. 넥타이를 맨 직장인끼리 삼삼오오 들어오는 모습도 흔했다.

연극은 소문대로였다. 아무리 에로물을 자주 봐 왔다고 하지만, 바로 눈앞에서 여자 배우가 실오라기 하나 없이 아랫도리까지 노출한 채 돌아다니는 모습은 어질어질했다.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즉물성(卽物性)’이라고 해야 할까. 그건 또 그러려니 했다. 충격적인 건 남자였다. 그의 탄탄한 상체 근육만 보려 해도, 가끔씩 폴짝폴짝 뛰어다닐 때의 민망함이란! 이런 모습으로 70여 분의 러닝타임은 흘러갔고, 난 공연이 끝난 뒤 과감히 전라 연기를 보인 배우들의 용기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냈다. 그래도 객석을 빠져나올 때의 찜찜함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평론가들은 벗는 게 나름 설득력이 있어 외설적이지 않다고들 말한다. 원작은 18세기 프랑스의 극작가 피에르 드 마리보가 썼다. 작품은 “인간의 본성은 과연 무엇일까”라는 데 의문을 품은 이들에 의해 남녀 4명이 갓난아기 때부터 사회와 격리돼 실험실에서 커 온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남자·여자라는 개념도 없이 지내오다 열아홉 살이 될 때 처음 맞닥뜨린다. 사회성이 없기에 부끄러움도 없고, 자연히 발가벗은 상태에서 연기해도 무방하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연출가는 “날것 그대로의 원초적 사랑과 사회화로 잘 다듬어진 현대적 사랑을 비교해 보여 주려”고 누드를 택했다고 한다.

사실 외설 시비는 묵을 대로 묵은 논란이다. 누군가 ‘한국 외설사(史)’를 쓴다면 작가 마광수·장정일은 빠지지 않을 것 같다. 최근엔 존 캐머런 미첼이 감독한 ‘숏버스’가 포르노에 전혀 뒤지지 않는 노골적인 섹스신의 위용을 보여 주기도 했다. 여기서 벗는 데 필요한 개연성이란 없었다. 대놓고 벗었고, 성(性) 그 자체가 소재이자 주제였다. 적나라한 성적 묘사를 통해 그들은 주류 사회를 통렬히 조롱했다. 기존 질서에 대한 ‘전복성’ 역시 가득했다.

노출 수위만 놓고 보면 연극 ‘논쟁’은 ‘숏버스’에 비해 거리도 못 된다. 그럴듯한 설정도 있기에 외설 시비에서도 자유롭다. 하지만 주제를 놓고 얘기하면 달라진다.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란 ‘남성성 혹은 여성성은 사회에서 습득되는 게 아닌, 타고난 것’ 정도다. 이런 문제의식을 전하기 위해 굳이 훌러덩 벗을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가벼운 걸 걸치는 게 시선을 뺏지 않고 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았을까. 행여 개연성이 있으니 외설 시비도 피할 수 있고, 해외 유명 작가가 썼으니 예술성으로도 포장할 수 있어 돈 되는 ‘알몸 연극’을 택한 건 아닐까.

우연일지 몰라도 연극 ‘논쟁’의 대박 이후 대학로엔 ‘벗기기 연극’이 붐처럼 이어지고 있다. 2009년 우리가 경계해야 할 건 철 지난 외설이 아니다. 교묘해진 상술이다.



중앙일보 문화부 공연 담당 기자. 타고난 까칠한 성격만큼 기자를 천직으로 알고 있다. 올해로 3회째를 맞은 ‘더 뮤지컬 어워즈’를 총괄 기획했다.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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