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형간염 바이러스 혈청분리 성공] '불치병' 예방 길 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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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천(千)의 얼굴을 가진 바이러스' . 미꾸라지처럼 체내에서 다양한 형태를 보여 첨단의학마저 속수무책이었던 C형 간염의 별명이다.

그런 C형 간염 바이러스를 수천만개의 단백질이 들어있는 혈청에서 골라내는 것은 모래사장에 떨어진 콩알찾기로 비유된다. 지금까지 미국.일본 등 선진국에서 불꽃 튀는 경쟁을 벌였지만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다.

김정룡 교수팀 역시 19년간 시행착오를 거듭해 왔다. 환자의 혈청을 수거해 일일이 PEG.DEAE매트릭스기법 등 19단계에 이르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 다른 단백질을 제거하고 C형 간염 바이러스만 골라내야 했기 때문이다. 혈청 4백80㏄를 2백㎕(1㎕〓1백만분의 1ℓ)까지 2천4백배 농축해서야 겨우 얻어낼 수 있었다.

C형 간염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지난 75년. 이로부터 14년이 지난 89년에야 미국 연구진에 의해 처음으로 유전자가 밝혀졌다.

지금까지 인류가 알고 있는 C형 간염에 관한 정보는 모두 유전자를 통해 실험실에서 만들어낸 단백질에 관한 것. 설계도만 갖고 완성품을 추측하는 것으로 실제 C형 간염 바이러스가 인체 내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C형 간염 바이러스는 B형과 마찬가지로 오염된 침이나 주사기.면도기 등 혈액을 통해 전염돼 피로.식욕부진.구토.황달 등 급성간염의 증세를 보인다. 급성간염을 앓은 환자의 85% 가량이 만성 C형 간염으로 이행된다는 학계의 보고도 있다.

우리 나라 사람 가운데 C형 간염을 앓고 있는 이는 60만~70만명 정도로 환자가 10%를 헤아리는 B형 간염보다 수는 적지만 B형 간염보다 자연치유될 가능성이 작고 간경변이나 간암으로 악화해 생명을 위협할 확률이 훨씬 높은 질병. 이번 연구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새로운 진단방법의 개발이다. 현재 C형 간염에 걸렸는지 여부는 혈액검사상 항체가 있는지 간접적으로 따져보는 방식. 바이러스 자체인 항원을 직접 살펴보는 방법은 없다. 감염 후 항체가 나타날 때까지 잠복기는 평균 50일이다.

金교수는 "혈청분리 성공으로 항체 대신 항원을 직접 검사할 수 있게 돼 잠복기에도 C형 간염에 걸렸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됐다" 고 설명했다.

보다 큰 의미는 예방백신 개발의 길이 열린 것. '바이러스의 실체가 규명된 만큼 이에 대항하는 예방백신을 만들어 내는 것은 시간문제다.

바이러스 등 미생물의 단백질 구조만 밝혀지면 유전자 재조합 기술을 통해 이를 격퇴할 수 있는 항체를 얼마든지 대량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만성 C형 간염의 치료법으로 공인된 것은 인터페론 주사가 유일하다.

최근 신약으로 개발된 리바비린과 인터페론 병합요법이 효과적이란 연구결과가 잇따르고 있지만 C형의 치료결과는 B형보다 신통치 않은 실정. 게다가 B형 간염과 달리 예방백신도 개발되지 않아 예방책으로 위생과 청결 등 일반적인 생활수칙만 강조돼 왔다.

金교수는 "혈청분리에서 응용된 새로운 항원진단방법은 수년내 환자들이 이용할 수 있겠지만 예방백신은 효능과 안전성이 충분히 입증돼야 하므로 실용화될 때까지 오랜 기간이 걸릴 것" 으로 내다봤다.

홍혜걸 기자.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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