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 새천년 앞서 대쇄신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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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요즘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정치가 부끄럽고, 행정이 부끄럽고, 언론이 부끄럽다. 어른도 부끄럽고 청소년도 부끄럽다. 남들은 더 강한 나라로, 더 큰 경쟁력으로, 더 단합된 나라로 새 천년을 맞기 위한 준비에 바쁜데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정치는 마비되고, 행정은 나사가 풀리고, 교실은 무너지고 있다는 아우성만 높아가고 있을 뿐이다. 과연 이런 상태로 새 천년을 맞을 것인가.

새 천년이라고 해야 이제 고작 달포가 남았을 뿐이다. 1999년 12월 31일과 2000년 1월 1일 사이에 무슨 높은 담장이 있거나 경계선이 그어져 있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세월의 흐름에 표시를 하고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새 다짐 새 각오 새 출발을 하자는 데 뜻이 있다.

그런 세월의 의미를 인정한다면 2000년이란 엄청난 계기요 기회가 아닐 수 없다. 통이 큰 사람이라면 천년 단위로 역사를 생각하게 되는 기회다. 범인(凡人)이라도 자기의 지난 인생과 공동체의 지난 세월을 비록 잠깐씩이나마 되돌아보고 더 나은 내일을 설계.준비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하는 귀중한 계기다.

전인류가 모두 새 출발을 준비하고 세계 각국은 자기 국민의 그런 준비를 북돋는 여러 노력에 한창 바쁜 요즘이다. 그런데 우리만 새 천년이 오는지 마는지 무감각.무기력하게 이런 식으로 떠내려가고만 있어도 괜찮은가.

이른바 언론문건 파동이 터진 이래 우리 정치의 꼴을 보라. 문제가 생겼으면 문제를 풀려는 진지한 논의와 노력이 나와야 할텐데 그런 모습이 보이는가.

문제는 언론장악 음모인데 그 진상을 파헤치는 노력은 실종되고 초점 흐리기와 고소.고발만 난무할 뿐이다.

정치개혁은커녕 불과 5개월 앞둔 총선을 치를 관련법 개정도 못하고 있고, 예산안과 허다한 국정현안들이 쌓여만 가고 있다.

국민의 일부 또는 다수로부터 언론장악 음모의 오해나 의심을 사고 있는 정부라면 이미 국민에 대한 지도력이나 신뢰에 상당한 금이 갔음을 뜻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런 의심과 오해를 푸는 노력을 해야 할텐데 지금 정부는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가. 검찰수사를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고 있는가.

어린 유치원생을 떼죽음시킨 씨랜드 화재에 이은 인천화재 참사를 보라. 일선 공무원들이 줄줄이 부패에 연루돼 있고, 법이나 규칙은 아예 작동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제대로 행정이 있는 나라인가. 그토록 공직기강과 부패추방을 외쳐온 입이 부끄럽지 않은가. 맹물 전투기의 추락을 보라. 이런 희한한 사건을 보고도 나라에 과연 기강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사건들은 이제 더 이상 과거정권 탓으로만 돌릴 일도 아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참담한 상황이 됐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도 안보이고, 상황을 헤쳐나가려는 지도자도 안보인다는 점이다. 화재가 날 때마다 장관을 갈아야 하느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화재의 원인구조나 배경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런 공직기강, 그런 행정풍토에 대해서는 정부차원에서 누가 책임을 져야 할 게 아닌가. 그저 돈먹은 말단들을 줄줄이 엮는다고 그 책임이 모면될 수 있을까.

정치가 앞이 꽉 막히고 국정이 표류한다면 사태를 풀고 방향을 제시할 지도자가 당연히 나서야 할텐데 평소에 말 잘하던 지도자들은 다 어디 갔는가. 정치권에서 고작 나온다는 말이 장외집회요 단독국회다.

정치를 검찰에 떠넘기는 한심한 수준밖에 안된다. 상황이 이토록 엄중한데도 귀기울일 만한 얘기 하나 나오는 걸 볼 수 없으니 기가 찰 일이다. 남에겐 도덕성을 요구하면서도 자기 식구가 거짓말하고 데데한 짓을 하는 데 대해서는 창피한 줄을 모른다.

이런 상태로 새 천년을 맞을 수는 없다. 최근 상황은 지금의 방식, 지금의 인물로는 더 이상 안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다. 새 천년까지 불과 달포가 남았지만 하루라도 빨리 훌훌 털고, 바꿀 것은 바꾸고 고칠 것은 고쳐 새 천년 준비를 하는 게 옳다. 어떤가, 우선 정부부터 대쇄신.대개편을 단행해 이 울적하고 암담한 현재의 흐름을 끊고 새 국면.새 분위기.새 출발을 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마침 선거도 멀지 않았으니 출마할 사람은 내보내고 나라의 일류들로 새 진용을 짜 새 천년의 새 출발을 준비하는 게 바람직하다. 하루라도 빠를수록 좋다.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대규모로 얼굴을 바꾸고 당기구.조직.운영도 확 뜯어고쳐 새 모습.새 분위기.새 출발을 해야 한다. 서로간의 고소.고발 같은 것은 모두 털어버려야 한다. 이제 무능.무(無)경륜.저(低)도덕성.위선 등은 드러날 대로 드러났다. 이런 요소들을 새 천년까지 안고 가서야 되겠는가.

송진혁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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