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노혜경 '고래와 달의 관계, 혹은 두 겹의 부름'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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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커다란 붉은 고래가 솟아올라 소리를 뱉는다.

쏟아진 소리들엔 갈고리가 달려 있다.

바다가 놀라 곤두선다.

물은 갈라지고, 물의 벽 사이로 길이 생기고 나는 걷는다.

물의 가시, 물의 칼날이 내 발을 가른다.

밭에서 흐르기 시작한 피의 강물이 바닷속으로 길을 낸다.

강물 아래로 헤엄치는 고래가 있다.

붉은 줄무늬 새겨진 흰 고래가 있다.

저 아래, 저 아래, 저 아래에 그 고래가

달과 달을 삼킨 별들의 고래가

- 노혜경(41) '고래와 달의 관계, 혹은 두 겹의 부름' 중

구약의 출애굽기를 연상시키는 바다의 스펙터클이다. 여성시인인데 아예 규방 따위 걷어치우고 대담하게 바람 찬 외계에 나타난 야생이 있다. 멜빌도 연상된다. 하지만 그런 현장보다 무척 관념적인 긴장이 시를 다그치고 있다. 악마적이기까지 하다.

이미지들은 단순동작이 허용되지 않게 다음 이미지와 복합된다. 의욕이 넘친다. 넘치는 만큼 너무 힘이 뭉쳐져 있다.

아무튼 여성도 이렇듯이 건장하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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