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커스] 삶의 질이 최우선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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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먼저 같이 생각해볼 만한 예를 두 가지 든다.

첫째는 복지문제를 논의하는 토론회에서 만난 유력한 정치인의 주장. 굶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복지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 발언의 요지였다.

두번째 예는 최근 외국에서 이뤄진 여러 연구의 결과다. 지나치게(?) 질병예방이 잘되면 평균수명의 증가로 노인인구가 급증하고, 결과적으로 국민경제에 장기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강조한 '생산적 복지' 가 마침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어제 대통령 비서실에 속한 삶의 질 향상 기획단이 생산적 복지개념을 총괄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공개한 것이다. 듣기로는 경제정책의 기조를 밝힌 DJ노믹스와 짝을 이뤄 DJ복지론(welfarism)의 내용을 구체화함으로써 국정운영의 기본틀을 제시한 것으로 본다.

내용을 충분하게 검토할 여유는 갖지 못했으나 여기에는 언뜻 보더라도 종래의 소극적인 복지에서 한 걸음 나아간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인 최소한의 기초생활을 보장하겠다는 것을 거듭 표명하고 있고, 필요한 경우 국가가 적극 개입해 국민의 기본적인 복지수요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물론 유례없는 경제위기가 달리 어쩔 수 없는 정책선택의 배경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삶의 질 향상 기획단이 발표한 '생산적' 복지의 특성은 공정한 시장질서의 확립, 자활과 자립에 대한 강조, 경제활동의 기회확대 등에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생산' , 즉 경제활동에 대한 참여의 보장과 공정한 보상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교적 적극적인 복지 지향성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점에서 생산적 복지는 분명한 한계도 함께 드러내고 있다. 복지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라기보다 경제성장을 보완하는 부차적(副次的) 요소라고 하는 종래의 시각을 완전히 탈피한 것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미 지난 정부에서 추진한 삶의 질 세계화와는 또 무엇이 다른지도 분명하지 않다.

사실 이 문제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정작 필요한 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이지 개념의 정교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다름 아니라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는 것이 경제활동이나 생산보다 훨씬 높은 가치라는 것이다.

경제활동이 삶의 질을 보장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라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복지는 그것이 생산적이든 아니든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굳이 경제활동과 복지를 정교하게 연결하는 노력은 필요하지 않다.

경제위기 징후가 완화되면서 과거를 돌이키려는 복원력이 모든 분야에서 힘을 더하고 있다. 여전히 복지가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러나 우리 사회 전체가 경제위기를 통해 과거의 사회발전 모형이 이제 그 수명을 다했다는 것을 교훈으로 얻지 않는 한 또다시 비슷한 위기를 반복할 가능성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경제위기가 우리에게 던진 교훈이자 질문은 '지속가능한' 사회발전의 전략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역사적인 경험에서든, 논리에서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끌어내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지속가능한 사회발전 전략의 핵심은 경제에 종속된 것이 아닌, 목표이자 의의로서 삶의 질에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결코 생산이 궁극의 목적이 될 수는 없음에, 삶의 질이 있고서야 여기에 봉사하는 경제발전이 있다.

이제 맨 앞에 언급한 사례로 돌아가 보자. 비록 국가경제에 주름살을 지울망정 질병예방에 소극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누구나 하는 공통된 답이리라. 그것이 바로 경제위기 이후의 새로운 건강.복지 패러다임이다. 여기에서 이것이 얼마나 '생산적' 인가 하는 물음은 개입의 여지가 없다.

김창엽(서울대 의대 교수.의료관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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