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 "중진들은 뒷짐만…" 문건정국 침묵에 불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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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그 많은 중진(重鎭)들은 다 어디에 갔는가. " 여권이 '언론장악 문건 정국' 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요즘 국민회의 의원들은 모이기만 하면 '중진 역할 부재론' 을 거론하며 탄식을 내뱉는다.

문건 정국 대처와 정국 정상화를 위한 대야(對野)협상, 신당 창당 등 현안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대부분의 중진들은 팔짱만 끼고 있다. 중진들의 소극적 자세를 놓고 신당 창당 프로그램에 따른 공천 문제에만 신경을 쓴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의 중진으로 분류되는 고문이 8명, 부총재가 17명이지만 이들은 요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그러다 보니 관리형으로 분류되는 이만섭(李萬燮)총재권한대행을 핵심에서 보좌하는 한화갑(韓和甲)사무총장.김옥두(金玉斗)총재비서실장 등 동교동계 실세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한 실무 당직자는 11일 "각종 회의에서 의안의 결론을 내리는 순간에는 참석자들이 두 사람의 얼굴만 쳐다본다" 고 실토했다.

이런 현상은 문건 파문의 한복판에 있는 이종찬 부총재를 다루는 장면에서 나타났다. 韓총장은 李부총재에 대한 밤샘조사가 끝난 지난 6일 새벽까지 검찰청사에 머무르며 그를 감싸는 자세를 보였다. 金실장도 남몰래 李부총재를 다독여왔다고 한다.

반면 대부분의 중진들은 '李부총재 말바꾸기 사태' 를 강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당직자는 "韓총장과 金실장이 李부총재가 치명적인 실수를 했더라도 당을 위해 나선 것인데, 다른 중진들은 제대로 된 수습책 하나 내놓지 않고 있다" 고 전했다.

야권에 지인이 많은 김상현(金相賢)고문, 김원기(金元基)상임고문, 한광옥(韓光玉).노무현(盧武鉉).김근태 부총재 등의 대야 설득 역할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중진들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권한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행동반경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국회직을 맡고 있는 한 중진은 "우리 여권 내 소수 강경파들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으로 가는 진언창구를 막고 있다" 면서 "유연한 대야 접근방안과 탄력적인 언론대책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다" 고 털어놓았다.

그는 "당의 총체적인 역량을 모으기 위해선 우선 중진들이 나설 수 있는 분위기를 청와대가 만들어 주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이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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