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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추적] 교민 돈 330억 챙겨 서울 잠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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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캐나다 밴쿠버 한인 사회에서 그는 선량하고 능력 있는 투자 전문가로 통했다. 워런 버핏의 ‘스노볼(snowball·눈덩이)’처럼 마법 같은 수익을 냈다. 어떤 교민은 매달 5%의 수익을, 다른 교민은 7년간 매년 30~40%의 수익을 지급받았다. 그러나 모든 돈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밴쿠버 한인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22일 “교민 200여 명으로부터 투자금 330억원을 받아 가로챈 뒤 한국으로 도망 온 캐나다 시민권자 김모(39)씨를 구속했다”고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330억원은 한국 국적을 가진 영주권자들의 피해 규모를 총영사관에서 집계한 것이어서 시민권자들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면 피해액은 더 커질 수 있다”며 “현지에서는 피해액이 700억원 이상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대학을 나온 김씨는 1999년 캐나다에 정착했다. 2002년 시민권을 획득한 그는 C투자회사를 차렸다. 김씨는 ‘교민 사회 네트워크의 중심’인 S교회에서 큰 신뢰를 받았다. ‘기독교 비즈니스 클럽’의 회장을 맡았다. 봉사활동도 열심이었다. 김씨는 투자자에게 “원유 등 상품의 선물에 투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무역업을 하는 밴쿠버 교민 K씨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한번 수익을 맛본 사람은 돈을 더 끌어 모아 투자했고, 친구와 가족까지 소개해줬다”고 했다. 1억원 이상을 투자한 K씨도 친구 소개로 김씨를 만났다.

김씨는 올 5~6월 대대적으로 투자자를 모았다. 브로커를 통해 ‘브리티시컬럼비아 금융감독원’의 승인을 받은 것으로 위장된 계좌로 돈을 입금받았다(김씨는 서류를 위조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브로커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씨는 투자자에게 이달 4일 수익을 환급하겠다고 통보했다. 바로 그날 김씨는 한국으로 도주했다.

김씨는 도주한 다음 날인 5일 투자자들에게 e-메일을 보냈다. “수익률을 맞추기 위해 금감원이 허용하지 않은 영화 사업 및 채권현물에 투자해 손실을 봤다”고 해명한 뒤 “6개월 내로 원금과 수익금을 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e-메일에서 그는 “소송을 벌이거나 금감원에 투서하면 실질적으로 얻는 것이 없다”고도 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의 회사는 금융위기가 찾아온 지난해 11월 자본잠식에 들어갔다. 그가 일을 꾸미기 시작한 것은 이때쯤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한국 경찰은 김씨가 e-메일을 보낸 5일부터 수사에 들어가 17일 그를 붙잡았다. 또 다른 교민 K씨는 “투자자 중엔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 있을 정도다. ”고 말했다. 의사·자영업자 등 상류층뿐 아니라 중산층 교민도 피해를 봤으며 피해액은 1억원에서 27억원까지 다양하다.

김씨가 빼돌린 돈 중 116억원은 국내 계좌로 입금됐다. 차명계좌가 대부분이다. 국내 계좌에 남은 돈은 800만원뿐이다. 김씨는 미국의 계좌로도 투자금을 빼돌렸다. 고교 동창들의 이름으로 된 차명계좌였고, 빠져나간 경로도 복잡하다. 전형적인 자금 세탁 방식이다. 18일 법원의 영장 실질심사에서 김씨는 “고객 보호를 위해 투자자와 투자액을 밝힐 수 없다”고 진술했다.

강인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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