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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 문화

드디어 구월이 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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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내 어릴 적 우리 마을 태욱이는 서울 가더니 배에 커다란 상처를 만들어왔다. 새 살이 수수알처럼 비어져 나온, '수수대궁'처럼 붉고 길쭉한 상처였다. 그는 내게 그걸 만져보라고 시켰다. "이게 내 무기야. 이걸 보여주면 웬만한 자식들은 다 도망가." 나는 그의 자랑거리인 상처가 끔찍하고 싫었지만 그게 태욱이에게 모종의 힘을 보태준 건 사실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늘 궁금해 했다.

올 여름 오아볼로씨를 만났다. 그는 유전성 질환을 가진 사람이다. 바람만 불어도 뼈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부러지는 병을 지닌 채 태어났다. 가난 때문에 병원에는 한 번도 못 가봤다. "죽는 방법을 알았다면 반드시 죽었을 것"이라고만 설명되는 통증을 수십년간 혼자 견뎌왔다. 응암동 열평짜리 다세대 주택으로 그를 만나러 갔을 때 아볼로씨는 시종 벙글벙글 웃었다. 불가사의하다는 날 향해 "믿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부족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말했다. 아볼로씨의 키는 1m가 못 된다. 누가 계단에서 휠체어를 놓치는 바람에 고관절마저 부러져 7년째 바깥출입은커녕 일어서지도 못한다. 그런데도 그는 뱃속에서 솟아나오는, 흔연하게 흐드러진 웃음을 연방 웃었다. 그 웃음이 눈부셔 나는 내내 쩔쩔맸다. "저는 뼈가 부러지지 않는 사람들은 당연히 행복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병이 없어도 사람들이 행복해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어요. 알고 보니 건강한 사람이 행복해지기가 더 어렵겠더라고요. 나처럼 장애가 있으면 포기가 빨라 만족도 쉬운 법인데." 그는 침대에 엎드려 하루 쉰 통의 편지를 쓴다. 재소자, 환자, 장애인, 소년가장, 거리를 방랑하는 청소년, 그 밖에 온갖 형태의 불행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따스하고 간절한 사연들을 보낸다. 지금껏 30만통 이상을 썼다. 자신의 아픔과 경험과 행복을 말하는 것만으로 그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가 전해진다는 것이 아볼로씨에겐 영 신기하다. 그의 곁에는 날마다 감사편지가 수북이 쌓이고 그걸 읽는 게 그의 큰 기쁨이다.

통증을 견디면서 슬며시 준(準)성인이 돼버린 사람들은 알고 보면 우리 주변에 숱하다. 안산에서 떠도는 청소년들을 모아 보듬어 안고 사는 '들꽃피는마을' 김현수 목사도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그가 만든 대안가정 아이들, 고1 김경준, 중3 신유섭과 얘기하면서 나는 상식으로 뒤덮인 눈꺼풀 비늘이 확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그들은 삶의 목표가 훨씬 분명했다. 눈빛과 태도와 어투가 사려 깊고 확신에 차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내밀한 콤플렉스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드러내 보여줄 줄 알았다. 김 목사는 어려서 혹독한 상처를 이겨낸 들꽃마을 아이들이 미래 세상의 보물이 될 거라고 말했다. "자기 고통을 이겨낸 사람만이 남의 고통을 쓰다듬고 치료할 수 있어요. 영적 지도자란 딴 게 아닙니다. 제 상처를 이겨내는 중에 남의 상처와 소통하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죠. 단 주변에서 그 상처를 사랑으로 감싸안을 때 가능한 일이죠. 인생이 늘 그렇듯 지도자와 낙오자는 딱 한 끗 차이예요."

생각하면 그 옛날 태욱이가 보여주던 배 위의 흉터는 고통의 흔적치고는 가장 유치한 형태였다. 그래도 그 어린 무리들은 거리를 떠돌면서 은연중 감지했던 모양이다. 상처가 힘이 된다는 걸! 사람은 아픔을 겪은 뒤 비로소 강해진다는 걸! 그렇지만 그 수수께끼의 정답은 아직 유보다. 다만 분명한 건 다 잃기만 하는 계산법은 세상에 없더라는 것이다. 빈자리에 반드시 뭔가 채워지는 물리법칙이 인생에도 작동하는 모양이다. 드디어 9월이 왔다. 열기가 식고 세상 풍경이 잘 보이는 계절, 곁사람 손을 당겨 잡기에 기온도 최상이다.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