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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를 넘어] 12. 구조주의·탈구조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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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중앙일보가 밀레니엄 기획의 일환으로 경남대(총장 박재규)와 공동으로 취재한 '세기를 넘어' 시리즈의 12번째 주제는 구조주의.탈(脫)구조주의이다.

최근 50년간 최대의 지성사적 사건' 으로 불리는 구조주의.탈구조주의는 단순히 이론적 사조가 아니라 근대 이후 이성의 확실성에 바탕을 두었던 모든 인식체계를 뒤엎는 지성사적 운동으로 파악된다.

이성.비이성, 합리성.비합리성의 이분법적 구도에 기초한 근대적 인식이 낳은 위기현상들이 본격적으로 노정되는 가운데 이를 넘어서려는 지적 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근대의 문제를 해소하고 새로운 밀레니엄의 과제를 담지한 담론으로 작동하고 있는 이 지적 운동의 흐름을 짚어본다.

'프랑스 지성의 심장' 소르본 대학을 찾았을 때 도서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문이 닫혀 있었다.

고풍스럽고 우아하게 장식된 도서관 열람실엔 1백여명 남짓한 사람들이 아늑한 스탠드 불빛이 밝혀주는 널찍한 책상들을 차지하고 무언가 각기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진지한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었으나 엄숙한 분위기를 깨뜨릴까봐 차마 셔터를 누를 수 없었다.

도서관이 있는 2층을 내려와 본관 중앙홀 오른쪽에 데카르트 강당을 마주하고 있는 루이 리아르 소강당을 찾았다. 중요한 박사학위 논문의 발표장으로 사용되는 이 강당에 61년 5월 20일 토요일 오후 1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의 징검다리를 놓은 미셸 푸코가 '광기의 역사' 를 발표하기 위해서다.

높은 연단 위에 길게 놓인 나무의자, 그 의자의 섬세한 조각 장식, 흐릿하면서도 은은한 조명이 장엄한 이 강당에서 푸코는 헤겔 연구의 대가인 장 이폴리트, 과학사가인 조르주 캉기옘을 비롯한 1백여명의 청중 앞에서 또하나의 철학자 탄생을 알렸다.

소르본이 배출한 걸출한 포스트모던 철학자 질 들뢰즈가 훗날 '현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 로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미셸 푸코. 그가 이날 내놓은 결론은 '광기(狂氣)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문명현상' 이라는 것이었다.

고전주의 시대가 지나고 17세기 합리주의가 도래하면서 지식〓권력, 즉 '지식권력' 이 형성된다. '아는 것이 권력이며 지식을 다스리는 자가 곧 권력자' 가 되었다.

그 결과 그때까지 다른 사람과 별다른 불화없이 섞여 살았던 거지.부랑자.방탕자.난봉꾼.동성연애자 등을 정신병자나 비정상으로 분리해 '감금'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근거가 된 인간이성에 대한 믿음은 어떤 원초적 명제가 아니라 불과 1백50년밖에 안된 '발명품' 이라며 데카르트 이후 서구 지성사의 밑그림이었던 '이성적 주체' 의 죽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70년 12월 2일. 학자들과 젊은 찬미자들이 푸코의 취임강연을 들으려 소르본 대학 근처에 있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 몰려들었다.

그러나 세계적 석학만을 교수로 초빙하는 콜레주 드 프랑스에 방문했을 땐 수리중이어서 그 현장을 들어갈 수 없었다. 오로지 장 라쿠튀르가 르 몽드지에서 묘사했던 것에서 당시의 분위기를 가늠해볼 수 있다. "마술에 걸려들길 기다리는 청중들 앞에 상아색 피부의 삭발남자가 나타났다. 그의 행동은 불교도 같았으며 눈빛은 메피스토펠레스 같았다. 그는 아이러니를 표현하려는 충동을 억제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

그날 그가 토해낸 것은, 다시금 지식을 권력의 통제와 연결시켜 "모든 사회에서 담론의 생산은 특정한 절차에 따라 통제.선택.조직.재분배됨으로써 권력의 생산에 기여한다" 는 저 유명한 '담론의 질서' 였다.

이렇게 두번의 강연을 통해 '광기의 철학자' 푸코는 프랑스 지성의 심장부에 곧바로 화살을 꽂았다.

'신성한 전당' 콜레주 드 프랑스에 발을 들여놓은 푸코는 동서와 좌우, 합법과 비합법을 가로지르는 질풍노도의 실천철학자로 자리를 옮긴다. 역설적으로 그 자신이 또다른 의미의 지식권력자가 된 것이다.

그가 가장 관심을 둔 것은 동성애자.수감자.수용소.소수민족 등 근대 자본주의가 생산해낸 구조 외부에 존재하는 약자들이었다.

취임강연 두달 후 그는 '감옥정보 수집그룹(GIP)' 을 결성해 자신이 75년 출간한 '감시와 처벌' 에서 보여주듯 징역과 체형이 어떻게 근대기율사회를 형성해 왔는가를 폭로한다.

이같은 관심의 밑바탕에는 당연히 68운동의 좌절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모색이 깔려 있다. 이성적 주체에 의한 체제변혁이 좌절하면서 '이성적 주체' 의 죽음은 불가피했다.

대신 푸코는 일상적인 차원에서 권력 그물망의 미세한 세포가 어떻게 우리를 옭아놓고 또 그것에 맞서기 위한 '참된 주체' 는 어떻게 형성할 수 있는지를 분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튀니지에 머물다 본국상황을 알기 위해 68년에 잠깐 파리로 돌아온 그는 학생들의 시위를 목격한 후 이것은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혁명 그 자체" 라고 단언했던 것도 그 운동에서 이미 미래의 한 자락을 읽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

푸코의 이같은 인식엔 그 자신의 이율배반적 경험도 작동했을 것이다. 음악가인 장 바라케, 철학자 다니엘 르페르와의 동성애, 고등사범 시절 거듭했던 자살미수와 불안, 68년 이후에 겪어야 했던 이민 노동자 생활, 극좌 마오쩌둥(毛澤東) 사상에의 일시적 심취, 그러면서도 폴란드에서 동성애 상대로 접근한 첩자의 밀고로 강제출국 당한 후 가졌던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증오심…. 그래서일까. 푸코의 정치적 행위들은 '진리.기술.지식의 이름으로 자신을 숨기면서 타자를 억압하는 권력들' 을 공격한다.

바로 이 지점은 정신분석을 통해 주체와 구조를 연결한 라캉과 해체주의자 데리다, 성과 권력의 상호관계를 조명한 들뢰즈 등 70, 80년대 전세계적으로 새로운 철학적 지평을 열어 '지난 50년간의 최대의 지성사적 사건' 으로 기록될 탈구조주의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가 밝혔듯이 감옥과 정신병원이 상징하는 근대적 억압구조를 분석하는 작업은 결국 '구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 이었다.

우리의 언어와 일상적 삶 속에 우리의 주체적 의식과 상관없이 작동하는 구조가 존재한다는 구조주의도 푸코에겐 또하나의 근대적 이성의 산물이자 억압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보편성' 의 이름으로 타자를 억압하는 지식을 '기만' 으로 인식했던 만큼 푸코가 선택한 것은 국지적 투쟁이었다. 자신의 선언처럼 "명증성과 일반성을 파괴하는 지식인을 꿈꾼" 것이다.

파리 7대학 연구실에서 만난 보데 패트릭 교수(철학)는 사르트르의 실천과 비교해 이렇게 설명한다. "사르트르와 푸코 모두 지식인이 실천에 참여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러나 전자가 항거의 이성적 명분에 치중한 반면, 후자는 항거에는 이성적 이유가 없음을 설파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

게릴라 지식인 푸코가 자신의 동료이자 논적이었던 사르트르의 장례행렬을 따른 지 4년만인 84년 6월 25일 파리 살페트리에르 병원에서 당시엔 희귀했던 에이즈로 죽었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르몽드에 기고한 추모사에서 그에게 '특수한 지식인' 이라는 또 하나의 명칭을 바쳤다.

생 제르맹의 한 카페에서 만난 철학자 알랭 핑켈크라우트는 푸코의 20세기적 의미와 21세기적 전망을 이렇게 요약한다.

"푸코는 인간이성에 대한 확실성을 바탕으로 미래를 진보시킬 수 있다는 상식을 뒤집어 근대적 합리성의 범위에서 제외됐던 광기를 복권시킴으로써 새로운 문명과 인식의 지평을 열어놓은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

파리〓김재현 교수(경남대.철학),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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