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그늘’ 세종고를 바꾼 리더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천재는 모든 질문에 해답을 건네는 자가 아니라 모든 해답에 질문을 건네는 자다.”(1학년 2반 이정민)

서울 강남의 낙후 학교였던 세종고를 살린 오용근 전 교장.올 8월 퇴임해 경희대 입학사정관으로 일하는 그는 “교장의 열정이 학교 발전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서울 강남구 수서동의 세종고 정문에는 이런 현수막이 걸려 있다. 2주일마다 바뀌는 이 현수막은 모든 학생들이 돌아가며 자기의 꿈을 알리도록 한 오용근(62) 전 교장의 철학이 담겨 있다. 사립인 세종고는 ‘교육 특구’인 강남의 ‘그늘’에 가려 있다. 주변 주택의 52%가 임대아파트로 어려운 형편의 학생이 많다.

오 전 교장은 이런 환경을 기회로 삼았다. 중학교 때 공부를 포기하고 고교로 진학한 학생들을 직접 집으로 쫓아다니며 방과후 교실에 참여해 부족한 공부를 해보라고 권유했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 귀하고 쓸모가 있으니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다. 그는 방과후 강좌 수를 60개로 늘려 수준별 수업을 제공하고 1년에 2주일씩 학부모들을 불러 모든 교사의 수업을 직접 볼 수 있도록 ‘수업 공개 주간’을 마련했다. 방학을 이용해 학생을 데리고 명문대 탐방을 다니고 학생들이 기자가 돼 ‘진학신문’을 만들어 정보를 나누도록 했다.

그 결과는 5년(2005~2009학년도)에 걸쳐 서서히 나타났다. 수능 언어영역 ‘6~9등급’의 격차를 줄인 학교 전국 5위, 외국어 영역은 서울 2위(1위는 중앙고)를 차지했다. 4년제 대학 진학률은 올해 처음 50%를 넘었다. 서울대 6명 등 상위권 대학 진학률도 6%로 올랐다. 학생들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가정환경이 어려워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방황했던 성진수(20)씨는 고 1때 5~6등급이었지만 3학년 수능에서 1~2등급을 받으며 한양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성씨는 “사교육 없이도 ‘방과후 학교’만으로 충분히 합격할 수 있었다”며 “오 전 교장선생님이 아빠같이 꿈을 키워 주셨다”고 말했다.

오 전 교장은 세종고에서 평교사로 시작했다. 수학과목을 담당하다가 연구부장이 됐고, 교감 재직 시 “기왕 하는 것이라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해 보자”며 동료 교사들을 다독였다. 김유동 교사는 “말로만 훈계하지 말고 ‘사랑’을 늘 행동으로 보이라고 주문했다”고 말했다. 교사들은 이 변화를 “조용한 혁명”이라고 불렀다.

이런 봉사 정신은 학교에도 퍼졌다. 올해 고교를 졸업해 명문대로 진학한 선배 세 명이 자발적으로 어려운 후배들을 과외로 지도하고 있다. 졸업생 중 한 명은 후배들을 위해 300만원의 장학금을 기탁했다. 문효영 진로상담부장은 “강한 추진력과 인화력으로 서서히 학교를 바꾼 리더십”이라며 “서울시내에 이런 인화력을 가진 교장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 전 교장은 올해 8월 퇴임해 경희대 입학사정관으로 근무 중이다.

이종찬 기자 , 사진=최승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