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복합적 위험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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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86년 발생한 소련 체르노빌 원전(原電)사고는 원자력발전 역사상 최악의 사고였다. 2차세계대전 말기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廣島).나가사키(長崎)에 투하했던 원자탄이 내뿜었던 방사능을 능가하는 8t가량의 방사능물질이 대기중에 흩어졌다.

방사능 물질은 프랑스.이탈리아까지 날아갔으며, 원전 건설을 반대하는 사회운동이 유럽 전역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체르노빌사건은 철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과학.기술을 인간의 통제하에 둘 수 있다는 신념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주장한 '위험사회론' 은 여기서 출발한다.

벡은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삶을 '문명의 화산(火山)위에 사는 것' 으로 비유한다. 근대화는 사회내에 위험의 확산을 가져왔고, 위험의 성격을 우연적 위험에서 구조적 위험으로 변모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벡은 근대화를 단순근대화와 성찰적(省察的) 근대화 둘로 나눈다. 산업혁명후 인류는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자연을 정복함으로써 외형적으로 큰 발전을 이뤘?

그러나 이는 단순근대화다. 단순근대화는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위험도 함께 만들어냈다. 이제부터는 위험과 안전을 사회발전의 중심에 두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성찰적 근대화다. 말하자면 성찰적 근대화는 근대화를 근대화하는 것이다.

벡의 '위험사회론을 한국 사회에 적용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선진국들이 3백년 걸려 이룬 산업화를 40년이란 단기간에 해치운 무리한 성장을 추구해오면서 발전이 지상목표가 되고 안전은 무시당해왔기 때문이다.

한 사회학자는 한국이 그동안 추진해온 근대화를 '돌진적 근대화' 라고 정의하면서 정상적인 근대화를 이룬 서구 선진국들에 비해 단순 근대화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한 한국 사회는 훨씬 위험한 복합적 위험사회라고 진단한다.

지난달 30일 인천에서 발생한 화재 참사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복합적 위험사회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다.

어느 나라건 대도시에는 언제든 대형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요인이 내포돼 있지만 이번 사고는 너무도 한국적이다.

있으나마나한 소방시설, 화재시 유독가스를 내뿜는 인화성 물질로 도배질을 한 실내장식, 잠겨진 비상구, 손님을 대피시키기보다 돈이 먼저인 업주 등 전근대적 야만성으로 가득 차 있다.

불과 4개월 전 씨랜드화재사건으로 유치원생들을 희생시키더니 이번엔 꿈많은 청소년들이 제물이 됐다.

이같은 사고는 계속 일어날 것이며, 누가 희생이 될 것이냐만 남아 있다. 끔찍한 대형사고를 겪고도 몇달만 지나면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 우리 사회가 선진사회가 될 날은 멀고도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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