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맹목정치의 집단히스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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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세상이 난장판이 된 지는 이미 오래다. 원칙과 정도(正道)가 없이 오직 집단이기주의와 편법만 난무할 뿐이다. 이래서야 하루하루의 삶이 불신과 갈등 속에 휩싸여 불안한 것은 물론 세계적 차원의 무한경쟁이 운위되는 21세기 정보문명시대에 낙오할 수밖에 없다.

연이어 터져나오는 사건.사고와 국제적 망신까지 불러일으키는 부정부패의 만연은 무원칙과 편법의 당연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지금이라도 사회 각 부문이 원칙과 정도를 따라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게 해야 함을 절감한다.

이번에 문제가 된 '언론대책문건' 을 둘러싼 사회 각 부문의 대응은 가위 집단 히스테리 현상이라고 볼 만큼 무원칙과 편법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정형근(鄭亨根)의원이 김대중(金大中)정부의 언론탄압 음모일 수 있는 '언론대책 문건' 을 폭로한 것은 그 나름으로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강래(李康來)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작성했다고 볼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는데도 그를 문건 작성자라고 단정하고서 마치 김대중정부를 무너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정치공세를 퍼부어 온 것은 일종의 히스테리적 반응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 문건이 이종찬(李鍾贊)국민회의 부총재 방에서 나온 것을 처음부터 알고서도 이를 밝히지 않은 것은 공작정치의 냄새를 풍기기도 했다. 그리고 이 폭로가 있고서 국민회의측이 나타내보인 반응은 가위 점입가경이다.

자기 당의 부총재가 그 문건을 보관하고 있었는데도 정형근 의원의 자작극이라고 몰아붙이는가 하면, 이 문건의 내용을 보면 중앙일보측의 소행일 가능성은 거의 전무한데도 이 문건 작성자가 중앙일보 기자라는 이유만으로 이 문건이 중앙일보 간부와 상의해 작성됐을 뿐만 아니라 정형근 의원에게 전달한 사람도 중앙일보 간부라고 몰아붙였다.

이 문건을 정형근 의원에게 건네준 사람이 평화방송 이도준(李到俊)기자임이 드러나자 공식적인 사과를 했으나 해프닝 차원의 것이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사건의 진상이 이 정도까지 밝혀졌으면 이제 이 문건이 과연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됐는지, 만약 보고됐다면 이 문건에서 건의한 바에 따라 언론을 탄압한 일이 있는지만 따지면 된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 문건에 따라 중앙일보 홍석현(洪錫炫)사장을 구속했다면 洪사장 구속은 언론탄압의 일환으로 확인되는 것이고, 만약 이 문건의 내용을 보고받은 일이 없거나 설사 보고받았더라도 이 문건에 따라 洪사장을 구속한 것이 아니라면 결국 이 문건은 여권의 일각에서 언론길들이기를 위해 하나 만들어 본 것에 불과하게 된다.

그래서 밝히거나 따져야 할 일은 이런 본질적 문제와 관련된 것이어야 하는데도 여야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 각 부문이 사건의 본질에서 벗어난 지엽말단적인 문제로 상대방 흠집내기에 안간힘을 쏟고 있으니, 이것은 일종의 집단히스테리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언론이 정권측의 언론탄압 음모와 관련한 문제에 대해 오히려 이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쪽을 공박하기 위해 온갖 엉터리 논리를 구사하는 모습은 보기에 민망할 정도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 우선 우리 사회에 원칙과 정도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김대중정부가 원칙과 정도를 벗어나 정책을 집행해온 데 중요한 책임이 있다. 다음으로 이 문건을 폭로한 쪽이 바로 지난날 언론탄압과 정치공작을 일삼아온 한나라당과 정형근 의원이기 때문이다.

김대중정부의 언론탄압이 아무리 밉더라도 지난날 언론탄압과 정치공작의 원흉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다시 집권한다면 김대중정부 이상으로 언론을 탄압할 것으로 보이는 한나라당과 정형근 의원에게 힘을 보태주기는 싫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우리 사회는 지역당구도의 정치로 말미암아 정치적 편가르기가 고착되어 있어 그 어떤 문제도 정치와 관련되는 한 합리적 판단이 불가능한 집단히스테리 현상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역주의 정치의 가장 큰 폐해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지금이라도 원칙을 세우고 정도를 따라야 한다. 상대방이 아무리 밉더라도 원칙과 정도에 따라 비판해야 한다. 그래야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

특히 정치적 편가르기에 따라 맹목적으로 비판하거나 두둔하는 집단히스테리 현상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되겠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를 맹목적 대립과 혼돈으로 몰아넣는 집단히스테리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인 지역당구도의 정치를 극복할 정치개혁이 반드시 이뤄져야 하겠다.

장기표<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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