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이근안 자수에 생각할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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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3~5공화국 때 대공수사관으로 있으면서 재야인사나 운동권학생 등 사건 관련자들에게 잔인하고 악랄한 고문을 가해 '고문 기술자' 로 악명높던 이근안(李根安)전 경기도경 대공분실장이 도피생활 11년 만에 자수했다.

드러난 반인륜적 범죄의 진상에도 불구하고 종적을 감춘 李씨의 해외도피설.성형수술설.사망설 등으로 피의자 처벌이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던 사건의 수사가 뒤늦게나마 종결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이로써 박종철 고문치사사건.부천서 성고문사건 등 군사독재정권 시절 저질러진 주요 고문사건 관련자 모두가 법의 심판을 받게 됐다.

88년 민청련 의장 김근태(金槿泰)씨 사건, 85년 납북어부 간첩조작사건 등 李씨가 받고 있는 고문 혐의는 한두건이 아니다.

전기고문.물고문.관절뽑기.통닭구이.볼펜심고문 등 피해자들이 밝힌 고문수법도 상상을 넘는 것들이다.

다른 기관으로 '고문출장' 을 다녔을 정도라고 하니 치가 떨린다. 李씨 수사를 통해 비인간적인 고문 실상뿐만 아니라 그가 다룬 사건의 수사과정의 문제점 등 과거의 잘못된 수사관행이 낱낱이 밝혀져 역사의 교훈으로 남기를 바란다.

아울러 검찰 수사는 李씨의 혐의뿐만 아니라 의혹 투성이인 그의 도피행각도 제대로 규명해내야 한다고 본다.

李씨는 지명수배된 상태에서도 일정기간 동료들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도피기간 대부분을 집에서 지냈다고 진술했다.

또 간혹 경찰이 집으로 찾아왔으나 자신이 숨었던 골방까지 철저하게 뒤지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수십명의 인원으로 李씨 검거 전담반까지 만들었다던 경찰이 실제로는 李씨 검거의 의지가 없었다는 의혹이 생긴다.

동료들이 돈까지 주었다고 하니 혹시 경찰의 조직적인 李씨 비호.은폐 의도는 없었는지 철저히 밝힐 일이다. 그같은 의혹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李씨의 자수동기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李씨는 최근 납북어부 간첩조작사건 가혹행위로 법정구속된 동료경찰관들의 형량이 비교적 가벼웠고 오랜 도피생활에 지쳤다고 자수한 동기를 밝혔다. 그러나 10년이 넘게 숨어 있다 왜 하필 지금 자수했는지는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 이른바 언론문건 파동으로 정국이 심상치 않다. 李씨의 자수로 고문의 배후 수사가 주목된다는 일부의 시각도 있는 것 같다. 李씨의 부인도 "남편은 위에서 시킨 대로 했을 뿐" 이라고 주장했다. 고문의 배후가 있다면 그것도 밝혀져야 하지만, 李씨 자수의 정국관련설도 지켜볼 일이다.

고문수사는 두말할 것도 없이 공권력에 의해 행해진 최악의 범죄행위다. 그것은 당하는 사람에게 육체적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더 큰 정신적 고통을 안긴다.

李씨 자신도 도피생활 동안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나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국가권력이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는 불행은 이제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를 바란다. 그것을 위해 이근안 사건의 마무리는 민주화의 진전과 인권정책의 강화로 이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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