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우리 편한 대로 수사 반성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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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경찰청은 지난 15일 비공개 회의를 열었다. ‘수사 오류와 자체 사고 방지에 대한 대책회의’였다. 회의에는 김병철 수사국장과 전국 지방경찰청 형사·수사과장이 참석했다. 구속영장이 기각됐거나 무혐의 처분을 받은 사건, 무죄 판결이 난 사례들을 모아 ‘문제점과 대책’을 논의했다. 회의에선 강도 높은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고 한다.

본지가 단독 입수한 회의 문건에는 “실적 경쟁과 언론 홍보에만 치중해 법률 검토가 미흡하거나, 사안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피의자를 입건해 전과자를 양산한다는 비난을 초래하고 있다”고 명시돼 있다.

회의는 강희락 경찰청장의 지시로 열린 것으로 알려졌다. 강 청장은 전화 인터뷰에서 “우리 편한 대로 수사하지 말고, 법과 절차에 맞게 수사하는 것이 국민을 위한 것 아닌가”라며 “수사 목적 달성을 위한 최소한의 수사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편한 대로’라는 것은 ‘증거가 불충분하거나, 수사 과정에서 법률에 나온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으로 풀이된다. ‘최소한의 수사’란 과잉 수사를 지양하라는 것이라고 한다. 강 청장은 ‘사법고시 출신 첫 경찰청장’이다.

회의에서 다뤄진 ‘경찰관 지갑 절도 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은 강 청장의 발언에 담긴 의미가 잘 반영돼 있다. 올 3월 7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야간집회에서 경찰관이 폭행당한 뒤 신용카드를 빼앗긴 사건이 일어났다. 집회에 참가했던 박모(53)씨가 범인으로 지목됐다. CCTV(폐쇄회로TV) 화면에는 박씨가 박모(36) 경사의 신용카드로 물건을 사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박씨의 범행은 명백해 보였다.

그러나 지난달 서울중앙지법은 절도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박씨가 박 경사의 카드로 물건을 산 것은 맞지만, 박씨가 카드를 훔친 것에 대해서는 정황만 있을 뿐 ‘의심할 수 없는 직접적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박 경사는 CCTV를 보기 전에 범인을 분명히 기억한 게 아니라, 화면을 본 뒤 범인이 박씨가 맞다고 진술했다. 법원은 이에 대해 “사진을 본 뒤에야 범인을 알아봤다면, 준수해야 할 절차를 충족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재판장을 맡았던 이규진 서울지법 부장판사는 “유죄가 강하게 의심되지만, 증거주의에 기초해 봤을 때는 무죄”라고 설명했다.


강 청장은 올 3월 취임 때부터 “경찰의 수사권 독립이 필요하다”고 줄곧 밝혀왔다. “수사권 독립을 위해서는 국민의 신뢰가 필요한데, 그 신뢰라는 것이 곧 수사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올 국정감사에서도 드러났듯 “경찰 수사가 부실하거나 지나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우윤근(민주당) 의원이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03년 1월부터 올 7월까지 경찰이 검찰에 송치한 사건 중 10.6%가 무혐의 처리됐다. 경찰의 구속영장 기각률도 증가하고 있다. 경찰청이 국회 행정안전위 김소남(한나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기각률은 2006년 17.6%에서 올해엔 22%까지 늘어났다. 경찰 관계자도 “인정하기 싫지만 경찰 수사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크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이런 흐름을 인식한 강 청장이 회의 개최를 지시한 것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경찰 수사는 ‘범인을 잡아 수사하고 판결하는 사법 흐름’의 한 부분”이라며 “그 흐름에 역행해서는 수사권 독립을 얘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회의가 반성과 대책을 모두 담은 이례적인 회의”라고 평가했다.

경찰청은 회의에서 ‘비위 등 자체 사고’도 경찰의 신뢰를 깎아먹는 중요 요인으로 꼽았다. 최근 인천에서 마약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이 조사 과정에서 범인으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사건 등이 회의에서 거론됐다.

강인식·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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