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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549.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제12장 새로운 행상 (27)

방극섭이 손씨를 하찮은 위인으로 보아서 묻는 말에 엉뚱한 대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첫째는 손씨가 승희를 찾고 있는 진솔한 내막을 털어놓지 않는 것에 은근히 부아가 났다.

게다가 손씨가 난데없이 불쑥 나타남으로써 이제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아 가고 있는 한철규의 복잡한 심사를 또 다시 흔들어 놓을 가망이 없지 않았다.

승희가 떠난 이후, 한철규는 겉으로는 태연자약이었다.

그러나 곁에서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던 방극섭에게는 뒤죽박죽에 넋이 나간 사람이란 징조가 역력했다.

자율신경조차 덩달아 헷갈리는지 담배를 거꾸로 물고 필터에다 불을 댕기는 일도 여러 번이었다.

잠꼬대가 심해서 같이 자던 형식이 놀라 들깨워 보면, 온 전신에 동이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식은땀 투성이일 때도 있었고, 중노동을 하면서도 끼니 건너뛰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찮은 일에 분통을 터뜨리고, 몽니를 부려 다른 행상들과 몸싸움을 벌여 피칠갑이 되기도 하였다.

체통이란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난삽한 행동이 시도 때도 없이 불거져 나왔다.

집중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들고나는 상품을 계산하다 말고 계산기를 집어던져버렸다.

세월이 약인 줄 알았더니 그 역시 허튼소리란 생각이 들어 방극섭이 승희를 찾아나설 작정까지 했었다.

상처받은 사람이 처연하게 침몰하고 있는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방극섭과 같이 애성바른 사람에겐 여간 심란한 게 아니었다.

마주 앉아 수작을 나눠보면 말버슴새는 멀쩡하게 보이는 사람이 장터거리로 나섰다 하면 개차반으로 돌변했다.

그러나 먹물 먹고 살아온 사람답게 언제부턴가 냉정한 촉각으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눈여겨 볼 줄 알았다.

스스로 닦달하고 추스르지 않으면 서발 막대를 휘둘러도 거칠 것이 없는 떠돌이 신세가 어디 가서 기댈 구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듯했다.

이른바 자력으로 이제 겨우 중심을 잡아가고 있는 형편에 손씨라는 사람이 불쑥 나타나서 한철규의 가슴에다 불을 지르려 하고 있었다.

방극섭은 그래서 끝까지 한철규의 행방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일부러 고흥 읍내까지 나가서 버스 타는 것까지 확인하고 돌아왔다.

두 번 다시 고흥 와서 한철규를 찾는 싱거운 짓을 말라고 면박까지 주었다.

손씨도 이젠 진퇴양난이었다. 돌파구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손씨는 안면도의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옌지의 아파트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전화를 받을 리 없었다.

다시 김승욱의 가게로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오래 전 베이징으로 떠나고 없었다.

게다가 언제 돌아올지 기약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가슴이 뜨끔했다.

혼자 속앓이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기동을 하게 된 박봉환을 밖으로 불러냈다.

손씨는 그곳의 도박판에서 저질렀던 불미스러운 사건만 숨기고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손씨의 자초지종을 듣고 있던 박봉환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런데 형님 안색을 보자카이, 그보다 더 심각한 일이 벌어진 거 아입니껴?"

"태호가 저지른 실수를 신사적으로 마무리짓자는 것인데, 뭐가 심각하단 말이여?"

"내가 형님 의도를 모르는 게 아입니다만, 그런 대수롭지 않은 일로 지금까지 형님 혼자서 속앓이만 했다는 게 이상하다는 이바구가 아입니껴. "

"태호가 저지른 실수를 묻어주자는 것뿐인데, 내가 보기엔 쥐뿔도 이상할 거 없네. "

"그렇다면, 내가 나서지 않으면 해결하기 곤란 하겠네요. 하루빨리 옌지로 가봐야 안되겠습니껴. 그 여자가 어디로 내뺐는지 찾아내는 방법도 옌지에서부터 시작되어야 두 번 실수가 없을 것 같고, 김승욱씨와 거래해서 정산해야 할 일도 있지 않겠습니껴. 형님도 내하고 같이 갈랍니껴?"

그 한마디에 하얗게 질린 손씨는 손사래를 쳤다.

"중국이라면, 이젠 꿈에 보일까 겁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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