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새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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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시인 정호승(49)씨의 새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창작과비평사.5천원)가 어른들을 위한 동화집 '항아리' (열림원.7천원)와 함께 나왔다.

베스트셀러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97년).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98년)등 90년대 후반들어 간결명료한 화법에 담아낸 맑은 서정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아온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이다.

때로는 10행도 채 못되는 짧은 시행으로 구성된 시인의 명징한 세계 밑바닥에는 슬프고 고통스런 현실에 대한 인식이 앙금처럼 자리한다.

슬프다, 고통스럽다 토로하는 대신 시로써 이 현실을 뛰어넘으려하는 시인의 노력은 이번 시집에서는 이따금 그로테스크하고도 극적인 이미지로 되살아난다.

예컨대 시인이 꿈속에서 칼든 사내에게 '시인이 되기보다 아버지가 되고 싶다' 고 말하자, 사내는 "대번에 내 머리를 잘라버리고/손에 들고 있던 새 머리를 내 목 위에 척 얹어주었다…그는 잘라낸 내 머리를 다시 한 손에 들고/어디론가 달빛 따라 길을 가고 있었다/그의 손에 매달려 가는 내 머리가/몇 번이나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시 '꿈' 중)는 식이다.

꿈속의 잘린 머리는 현실의 자기로부터 탈바꿈하고픈 시인의 무의식적 욕망일까. "내가 내 목을 잘라/한강 모래밭 장대 끝에 높이 걸어놓았나니…슬프도다 바람이여/이제는 나를 간간이 말려주고/한강을 지나는 밤기차의 따스한 불을 한번만 더 보게 해주고/내 호주머니에 든 숟가락 하나/멀리/강물 속으로 던져다오" (시 '효수(梟首)' 중)

시인이 깨달음을 얻는 것은 박물관에서 "머리없는 돌부처들에게 다가가/자기 머리를 얹어" 보는 초등학생들의 장난으로부터다. "소년부처다/누구나 일생에 한번씩은/부처가 되어보라고/부처님들 일찍이 자기 목을 잘랐구나" (시 '소년부처' 중)

우리 나이로 쉰. 아직도 소년인양 맑은 얼굴의 시인은 최근의 다작(多作)과 대중적 인기를 삐딱하게 쳐다보는 기자의 시선을 곧 눈치챘다.

"남들이 시만 쓰고 사나보다고 할 것 같다" 면서 먼저 말머리를 꺼낸 시인은 "시를 한 편도 쓰지 않았던 30대 초반의 5년간, 40대 초반의 7년간" 를 후회로 돌이키면서 "내가 열심히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아는 지금, 열심히 쓰고 싶다" 고 말했다.

출판사.신문사에서 오랜 직장생활을 했던 그이지만 지금은 실제 '시만 쓰고 사는' 전업시인.

이번 시집 역시 미발표작으로만 묶인 전작시집이다. 작업실에 규칙적으로 출퇴근하면서 워드프로세서로 작업을 하는 그의 면모는 시인에 대한 고정관념과는 사뭇 다르다.

"활자는 시의 도구인 언어가 입은 비밀의 옷을 벗겨낸다. 워드프로세서로 작업을 하면 언어의 알몸을 보다 빨리 볼 수 있다" 고 말을 이어간 시인은 "시는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침묵으로 이루어진 무엇이기도 하다.

언어가 수면이라면, 그 물밑의 침묵이 내게는 더 소중하다" 면서 자신의 시가 짧은 이유를 설명했다.

"목가적 시인의 시대는 김종삼, 천상병 시인으로 끝났다" 면서 시인 역시 "급변하는 20세기를 살아가는 생활인" 임을 강조하는 그에게 한번 더 삐딱하게, 다소 보수적인 시세계에 대해 물었다.

시인은 "2천년대에도 한용운, 김영랑, 신석정, 서정주를 모르고는 시를 쓰기 힘들 것" 이라면서 전통적 서정을 강조하면서도 " '전통의 변용' 이야말로 내 숙제" 라고 답했다.

고속(高速)의 시대일수록 독자들이 원하는 것은 완급의 미학일까. 그의 서정적 시세계의 연장에 서있는 동화집 '항아리' 에 대해 동화작가 정채봉씨는 "연필로 또박또박 눌러 쓴 작품" 같다고 평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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