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기협의 책 넘나들기] 새로운 눈으로 본 인디언의 모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 인디언, 환경친화적 존재□(The Ecological Indian)

□ 셰퍼드 크레크 지음 / 노튼앤컴퍼니 출간

1950년대까지 인디언의 보편적 이미지는 고전적 서부영화에서 보듯 문명에 대한 위협, 또는 문명의 정복대상으로서 '야만' 이었다.

선량한 개척자들을 공격하는 '나쁜 인디언' 들 중에는 문명을 동경하는 인간 본성에 따라 백인을 돕고 따르는 '좋은 인디언' 도 더러 있었지만, 그 존재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야만' 에 있었다.

1960년대 들어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면서 인디언은 새로운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 (1962)에 그려진 문명의 자연파괴 측면과 대칭을 이루는 환경친화적 문명의 대표로 인디언이 떠오르게 된 것이다.

사냥을 하되 남획(濫獲)을 삼가고, 농사를 짓되 토지형질을 바꾸지 않으며 자연과 평화상태를 누려 온 인디언들. 그들의 전통적 생활방식을 일방적으로 파괴한 '문명의 폭력' 을 참회하는 마음과 함께 '자연 속의 인간' 으로서 인디언의 생활자세에 대한 존경심이 60년대 후반 반전(反戰)-반문명(反文明)의 히피운동 밑바닥에 깔렸다.

그러나 브라운대학 인류학 교수 셰퍼드 크레크는 '인디언, 환경친화적 존재□' 에서 인디언을 환경친화적 존재로 규정하는 새로운 통념에도 반대한다.

인디언을 야만적 존재로 규정하던 전단계의 통념과 마찬가지로 이 새로운 통념 역시 유럽계 미국인의 잣대로 재단한 관념일 뿐이며, 인디언의 실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디언 전통문화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배어 있는 이 책에서 크레크는 문화적 맥락 위에서 복합적인 접근을 하지 않고는 인디언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식량으로서 중요성을 가진 동물들을 인디언들은 단순한 동물로 보지 않았다. 인간과 같은 지각(知覺)을 가졌거나 심지어는 신(神)이 보내준 존재로서 영성(靈性)을 가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런 인식이 인디언의 사냥방법에 영향을 끼쳤다. 예컨대, 한 번 몰이에 든 들소떼는 식량이 남아 버리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꼭 전멸시켜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도망쳐 나가는 놈이 있으면 다른 들소들에게 인간의 위협을 알려주기 때문에 인간을 피해다니게 되고, 따라서 사냥감을 찾기 어렵게 된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이것은 '환경친화적 존재' 의 이미지에 잘 맞지 않는다.

최후의 빙하기가 끝날 무렵인 지금부터 1만년에서 1만1천년 전 사이에 아메리카대륙의 동물상이 크게 변한 일이 있다.

맘모스와 마스토돈을 비롯한 거대동물들이 이 시기에 절멸(絶滅)했고, 조류 등 다른 동물들의 종(種) 분포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고생물학자 폴 마틴은 1967년 이 절멸사태의 주범이 인디언의 조상들이었다는 학설을 발표했다.

인류가 시베리아에서 알라스카로 건너온 것은 1만4천년 안쪽의 일로 추정된다. 사냥기술을 가지고 건너온 이들이 아직 인간의 위협에 익숙치 않은 아메리카의 동물들을 입맛대로 잡아먹은 결과 생태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 마틴 학설의 골자였다.

이것은 환경친화적 존재로 막 자리잡은 인디언의 통념을 뒤집는 지적이었기 때문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크레크는 마틴의 학설이 지나치게 편향된 가정 위에 세워진 것이며 기온의 상승과 연교차 확대, 건조화 등 빙하기 말기의 기후변화에서 더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역할도 조금이나마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태평양의 여러 섬에 인간이 도착하면서 생태계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킨 사례도 확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은 상대적으로 인구가 희박한 상태에서 지내던 인디언을 야만적이라고 보기도 하고 환경친화적이라고 보기도 했다.

크레크의 눈에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인디언에게 배울 것은 환경친화의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자연과의 대결에도 다양한 자세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김기협 문화전문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