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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新고립주의' 조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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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핵실험전면금지조약(CTBT)비준안이 미 상원에서 부결된 다음날인 14일(현지시간)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일부 정치인들 사이에 '신(新)고립주의' 성향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우려섞인 분노를 터뜨렸다.

냉전후 유일 초강국의 권위를 만끽하는 미국에서 웬 고립주의 논쟁이냐고 하겠지만 적어도 미 대통령이 자유세계의 수장(首長)역할을 맡는 것을 당연시했던 시절은 이미 흘러갔다는 조짐이 진작부터 감지돼 왔다.

비근한 예로 코소보 사태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놓고 공화당 의회 지도부는 '클린턴-고어의 전쟁' 이라고 비난하며 "미 국익이 직접 위협받기 이전에는 미군의 해외파병을 반대한다" 는 반(反)개입주의 노선을 표방했다.

게다가 공화당은 2000년 대외 관련 예산을 20억달러나 삭감했으며, 17억달러에 이르는 유엔 분담금 미납분을 충당키 위한 예산배정에도 몹시 인색하게 굴었다.

신고립주의 조짐은 냉전종식이라는 주변 정세의 변천과 미국내 정치환경의 변화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워싱턴 정가의 인식이다.

특히 94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상.하 양원을 휩쓸고, 전후 세대들이 대거 의회에 진출하면서부터 두드러졌다.

대외정책보다 국내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소장파 의원들과 대외문제에 관한 한 최소한의 개입이 미국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독특한 입장을 취하는 이들이 상당한 세력을 이루면서 신고립주의 성향이 팽배해졌다는 것이다.

일반 미 국민의 태도 역시 정치인들의 이같은 추세를 부추기고 있다.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국제문제를 중시해야 한다' 는 사람은 87년에는 전체의 22%였으나 96년에는 6%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외교협회의 최근 조사에서도 '내 고장 소식에 관심이 많다' 는 사람이 60%, '국내문제에 관심이 많다' 는 사람이 47%인 반면 '국제 사정에 관심이 많다' 는 이들은 29%에 불과했다.

결론적으로 최근 미국 정가의 신고립주의 성향은 ▶냉전시대를 거치며 국제주의 성향을 지녔던 공화당내 인사들이 나이가 들어 정치 전면에서 서서히 퇴장하고 ▶대신 국제.국방문제에 경험도 적고 관심도 없는 새로운 정치세대가 등장한 데다 ▶여론의 무관심이 계속 심화되고 ▶민주당 출신 대통령에 대한 공화당측의 반감 등이 복합돼 빚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당수 정치 분석가들은 만약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이 집권할 경우 이같은 고립주의 경향이 상당히 조정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현실 외교를 책임지고 추진하다 보면 미국의 대외적 역할 확대를 중시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인 것이다.

워싱턴〓길정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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