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39.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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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제12장 새로운 행상 (17)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니까. 어찌된 내막인지 알 수는 없지만, 승희씨도 철부지가 아닌 이상 자신의 앞가림은 하겠지. 결단성도 남달라 보이고, 여자로서 배짱도 그만하면 어디 가서도 남의 빈축이나 살 일은 벌이지 않을 것이여. "

"어떻게 할래요? 수습해서 곧장 떠나겠습니까?" "불안하다면 떠나야지. 사실은 집안 일도 궁금하고…. "

그가 떠난 뒤 태호는 옌지에 혼자 남게 되었다. 거치적거리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나니까 바짓가랑이에 묻은 도깨비바늘을 말끔하게 털어낸 것처럼 홀가분했다.

핑계만 있다 하면 생쥐 풀방구리 드나들 듯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안마방 출입을 일삼는 손씨의 의미심장함에 줄곧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더 깊이 빠져들어 변고를 만들기 전에 한국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 상책이었다.

안마방에선 안마만 받는 게 아니었다. 그런 음습한 장소를 은신처로 삼아 조선족 건달들과 포커판을 벌이는 눈치도 역력했었다. 죽이 맞는 박봉환과 동행했더라면 포커판 현장을 덮쳐 드잡이해서 끌어내기라도 했겠지만, 태호 혼자로선 역부족이었다.

알 수 없는 것은 판돈의 출처였다. 태호는 그에게 일용돈조차 건네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안마방에서 쓰는 비용이나 판돈이 도대체 어디서 변통이 되는지 도무지 오리무중이었다. 하긴 노름꾼의 판돈은 밤낮으로 허벅지를 비비고 살아가는 아내조차 출처를 모른다는 말이 있긴 했다.

기특한 것은 안마방에 단골여자를 두고 있었고, 건달들과의 포커판을 벌여 왔었던 것에 미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태호의 제안을 고분고분 따라 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순순히 따라 준 것에 또 다른 속내가 있을까 염려했던 나머지 웨이하이까지 동행해서 그를 여객선에 승선시키고 옌지로 돌아왔어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우선 박봉환을 만나 정산을 하고 난 뒤, 승희가 거처하고 있을 만한 곳을 수소문해서 알려 달라는 당부도 물론 잊지 않았다.

손씨를 먼저 떠나 보낸 중요한 원인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늦더라도 승희가 고흥으로 내려가 한철규와 합류하게 된다면 그런 다행이 없겠지만, 만의 하나 어긋나게 되면 한철규를 다시 만날 면목이 없었다.

모든 불찰을 태호 혼자서 뒤집어써야 했다. 태호로선 그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그녀의 거처를 찾아내는 일은 절망적인 순간에 이르기 전까지는 한철규가 알 수 없게 되기를 바랐다. 그를 떠나 보낸 후에도 승욱과 동행한 포시에트 내왕은 두 번이나 있었다.

그래서 이젠 시쳇말로 눈을 감고 걸어도 잠행로 어디를 걷고 있다는 것쯤은 알아차릴 만했다. 포시에트에서는 사향을 구입할 수 없으면 말린 해삼을 구입해서 베이징의 식품시장과 거래가 닿아 있는 옌지의 상인에게 팔아 넘겼다.

상거래가 활발해진 것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무기판매로 러시아 전체의 경기가 조금씩 호전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래선지 옌지의 시스창에서 구입해가는 가죽제품 의류들은 보따리를 풀기도 전에 물건부터 선점하려는 원매자들끼리 당기고 밀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잇속도 쏠쏠했거니와 언제나 승욱과 동행이었으므로 흥정에 막힘이 없었고, 창링즈의 조선족 마을 사람들과의 친교를 유지하는 것에도 더 이상 갈등을 겪지 않았다.

그런 사이에 태호는 이미 위조여권의 비자기간도 끝나 어느덧 불법 체류자로 분류되고 말았다. 그러나 요로에 안면이 수두룩한 김승욱의 수완을 믿고 있었으므로 크게 걱정할 것은 못됐다. 걱정이 있다면, 손씨가 귀국한 지 열흘이 지났는데도 승희의 행방을 찾았다는 소식이 없는 것이었다.

그동안 박봉환도 차도가 있어 웨이하이 상인들과의 거래를 복원할 수 있는 길이 멀지 않았다는 소식이었다.

아무래도 한철규에게 사실을 곧이곧대로 통보해 주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아파트의 철제문이 소리없이 열리고, 세 사내가 쏜살같이 현관으로 뛰어든 것은 태호의 결심이 거기에 이르렀던 날 한밤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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