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정부 언론탄압 진상을 밝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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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98년 3월 9일 밤. 중앙일보 서소문 사옥 21층 사장실.

11시가 조금 넘었을 때 박지원(朴智元.현 문화관광부장관) 당시 대통령 공보수석이 들이닥쳤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들어서는 그의 입에선 술냄새가 물씬 풍겼다.

"정권에 비판적인 중앙일보의 보도태도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朴수석은 들어서자마자 중앙일보에 대한 불만을 원색적으로 토해 냈다.

이런 당돌함에 방에 있던 중앙일보 발행인 홍석현 사장과 당시 편집인 금창태(琴昌泰)부사장, 그리고 한남규(韓南圭)편집국장은 아연할 따름이었다.

사장실에 전화를 했다가 간부들이 모여있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온 朴수석의 입에선 협박조의 얘기가 거침없이 이어졌다.

"우리가 이제는 야당이 아닌 집권당인데 계속 이렇게 섭섭하게 할 수 있나" "내가 하지도 않은 얘기를 엉터리로 쓴다" - .

중앙일보 간부들은 "뭐가 섭섭하다는 말인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얘기하라" 며 반박했다.

언성이 높아갔다.

끝내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朴수석은 벌떡 일어섰다.

몸을 굽혀 탁자 위의 크리스털 유리 물잔을 집어든 그는 탁자옆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조각과 얼음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琴편집인 등은 어이없어 하는 洪사장을 피하게 한 뒤 "이게 무슨 짓이냐" 며 朴수석을 붙들었다.

朴수석은 "이거 놔. 나 갈거야" 라며 뿌리쳤고 그 와중에 고성과 몸싸움이 벌어졌다.

한바탕 소란이 있은 후 韓국장의 안내를 받으며 사장실을 나온 朴수석은 중앙일보 정문을 나서면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 는 듯 넙죽 맨 땅에 엎드려 큰 절을 했다.

그리고는 "잘 해봅시다" 라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시계는 0시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땅에 민주적 정권교체를 이뤘노라고 자부하는 현 정부 실세의 위세는 사실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게 확인된 직후부터 시작됐다.

97년 12월 대통령선거 다음날인 19일, 박지원씨는 김대중후보의 당선을 알리는 기사가 나가자마자 중앙일보 경영진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1면 톱기사의 컷(제목)이 다른 신문에 비해 너무 작습니다."

金후보의 활짝 웃는 사진과 함께 실린 기사의 제목( '김대중후보 당선' )이 신문 전체 폭의 3분의2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朴씨에게는 불만스러웠던 것이다.

그가 전화를 끊으면서 남긴 말의 여운은 길었다.

"이제 우리가 집권했는데, 두고 봅시다."

이후 공보수석이 된 朴씨는 물론 국내언론 담당비서관이었던 박준영(朴晙瑩.현 공보수석)씨 등 청와대 관계자들의 전화는 거의 매일 걸려왔다.

기사를 넣어달라, 빼달라, 고쳐달라. 때론 "어른(대통령)이 불쾌하게 생각하신다" 는 말로 압력의 강도를 높였다.

오죽하면 중앙일보는 사장과 편집인, 편집국장과 정치부장석 등의 전화에 녹음기를 달았겠는가.

제작 간섭의 실상을 생생하게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언론에 대한 간섭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예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끔 편집 진용을 구축하려고 시도했다.

편집국장과 정치부장 등 편집국 주요 간부와 논설실장을 비롯한 논설위원에 '누구를 빼고 누구를 앉히라' 는 요구까지 해왔다.

물론 洪사장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럼에도 정권 획득이 언론사의 인사권까지 보장한 양 으름장은 끝이 없었다.

민영 언론사에 대해 이러했으니 여타 언론에 대한 정권의 간여수준이 어떠했는지는 미루어 짐작이 가는 것이다.

권력의 전횡은 집권이래 1년7개월 동안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많은 언쟁과 논박이 있었고, 간혹 기사가 누락되거나 변질되는 일도 있었다.

대부분의 외압을 물리쳤다고는 하지만 중앙일보가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어쨌든 중앙일보 사장이 구속되는 사태에 이른 마당이다.

중앙일보는 간단없이 계속된 외압과 저항의 실상을 알리는 시리즈를 통해 지금도 계속되는 척박한 언론환경의 내면을 속속들이 드러내 보임으로써 독자들의 정확한 현실인식을 돕고자 한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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