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김수영 '살아있는 상처'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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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 밤 그대

내 열한번째 손가락에

황금반지를 끼워 주었어요.

어두운 무덤에서 나와

환한 전시실 한켠에 누워있는,

저것은 칼이다.

이제 칼은 그 푸른

섬광을 잃었다.

끊임없이 제 안의 붉은 녹을

밀어내지만, 세월은 아직

항아리 속의 곡식처럼,

그것을 흙으로 돌려놓지 못했다.

물과 불로 증오심만 벼렸던

달빛마저 저밀 것 같던

푸른 날로,

스스로를 베었던 기억.

- 김수영(30) '살아있는 상처' 중

박물관은 자칫하면 죽음의 공간이다. 박물관의 전시물에 대한 해석이 없으면 그것들은 삶의 의미를 지니지 않고 불귀의 객으로 거기 있을 뿐이다.

사람의 눈이 닿을 때 그것들은 비로소 살아난다. 사전 속의 낱말들이 글 속에서 종종걸음으로 살아나듯이.

고대의 칼 도막 하나가 여기 나와 있다. 시인은 그 칼을 지난 날 스스로를 베었던 기억으로 되돌려놓고 싶어 눈빛을 빛내지만 그것은 오래전 칼의 눈빛을 잃은 녹슨 도막으로 차라리 아직 흙에 속하지도 못한 정신으로서의 증오심이던가. 과거의 어떤 물건에도 그 사연대로 엘레지를 담고 있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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