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독학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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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자
배수아 지음, 열림원, 243쪽, 8800원

배수아(39)씨의 새 장편소설 『독학자』는 영혼의 스승과 토론 문화를 찾아볼 수 없는 1980년대 중반 대학 풍토에 실망한 나머지 입학 세 학기째 자퇴를 결심하는 스무살 청년의 이야기다. 비이성적인 동맹의식에 사로잡혀 정치적 행동으로만 치닫는 학생들의 모습도 주인공에게는 의아스럽다. 결국 주인공은 마흔살까지는 생계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만 벌며 ‘독학’하기로 마음 먹는다.

주인공인 내가 대학에서 기대했던 것은 정신과 지성의 진정한 진화였다. 대학이 밤낮으로 토론이 이뤄지고 서로의 사유를 교환하며 실리적인 목적에서 벗어난, 오직 정신 자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나의 꿈은 입학 한 달도 되지 않아 순진하고 무모한 것으로 드러난다. 교수들은 십수년은 됐을 강의 노트를 만원 지하철 같은 교실에서 낭독만 하기 일쑤고, 어쩌다 학생의 까다로운 질문에 답이 궁해지면 “그래서 자네가 나보다 더 많이 안다는 거야?”라고 윽박지른다. 처음에는 수학이나 통계학을 전공하고 싶었으나 논리학에 더 끌린 나는 전과(轉科)를 모색하지만 원천 봉쇄된다. 학사규정은 알고 보니 무엇 무엇을 금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대학의 행정 단위들은 거대 관료조직일 뿐이다.

나는 학생들의 집단행동도 의심스럽다. 일례로 나의 유일한 친구 S는 학생 지도부의 방침을 거스르고 끝까지 수업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앞으로 다가올 민중민주사회에 유해한 이기주의자로 몰려 무형의 탄압을 받는다. 독재와 전체주의에 동원되던 집단적인 행동 원리가 진보를 추구하는 데모대 주변에서도 작동한 것이다. 나는 역사의 진보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의심하게 된다. 또 캠퍼스 주변에 만연한 알코올 문화는 혁명의 기운으로도 작용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내가 정치적 민주화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나 스스로 지나친 회의주의자가 아닐까 돌아보기도 한다.

사실 제도 교육에 대한 나의 회의는 뿌리 깊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자의식과 독립심이 강한 편이었다. 네 살 무렵 이미 남에게 비웃음을 사느니 죽어버리는 것이 백 번 낫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 내게 학생들이 개구리 해부 실험을 원하는지 여부를 묻지도 않고 빠짐없이 참가하도록 한 초등학교 시절 수업은 거대한 모순으로 남아 있다.

답답한 나의 대학 생활에 숨통을 틔워준 것은 S와, 역시 독립된 정신의 소유자인 수학교수 P였다. 나는 그들과의 조우를 통해 “타자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별개의 독자적 세계인, 오직 스스로 결정하기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얽매여 있지 않는” 자유를 찾아나설 용기를 얻게 된다. 또 내가 꿈꾸는 세상은 대중문화나 오락거리가 없어 사람들이 상상력과 영감에 불타 밤이면 책을 읽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종교와 신성을 존중하지만 아무도 신자가 되지 않고, 문학과 예술을 너무 사랑하지만 아무도 그것으로 이름을 얻기를 욕망하지 않는다.

배씨는 작가의 말에서 “서기 250년 이집트에서 태어나 이십 세 때 신과의 절대적 교감을 위해 사막으로 들어간 최초의 사막 은둔수사 성 안토니우스에 관한 글이 소설의 주인공 ‘나’를 만든 계기였다”고 밝혔다. 나의 ‘독학’은 안토니우스의 ‘사막’이었던 셈이다.

말 그대로 절대적인 경지에 이르기까지, 사태와 주장의 핵심을 파고들며 비합리적인 부분을 까발리는 배씨의 신랄함이 흥미진진하다. 구체적인 사안들이 도마 위에 오르기 때문에 앞서 발표한 장편 『에세이스트의 책상』보다 쉽게 읽힌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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