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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럼] 한국경제는 '입'도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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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본 대장성의 전(前)재무관 사카키바라 에이스케(木神原英資)는 '미스터 엔' 으로 통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일본 엔화값이 곧잘 춤을 추었다. 엔화가치에 무슨 조짐이 일면 국제 금융계는 그의 입부터 주목했다.

그 영향력만큼이나 얻어듣는 정보도 많았다. 그는 막강한 '금융외교관' 이었다.

국제적인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는 일본경제의 또다른 '입' 이다.

글로벌시대의 경영 자문가로 그의 아이디어와 행동반경은 국적(國籍)을 초월했지만 국제무대에서 일본과 일본적 가치를 이해시키고 대변하는 역할 또한 갈수록 두드러진다.

막대한 무역흑자가 '악덕' (惡德)으로 인식될 정도로 일본경제의 대외 이미지는 지금도 좋지가 않다.

그럼에도 이들 '스타' 덕분에 웬만한 허물들은 덮어지고 희석된다. 국제통화기금(IMF)사태 이후 한국경제의 '입' 들은 주눅이 들었다.

환란이 오는 줄도 까맣게 몰랐으니 하기야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경제는 어느 새 바깥 입들의 '훈수' 에 휘둘리는 '동네 장기판' 꼴이 됐다.

구제금융 지원과정에서 저들의 '무용담' 과 한국경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 재벌개혁 및 구조조정에의 충고 등은 이제 귀에 못이 박힐 정도다. 위기를 자초한 주제에 바깥의 비판들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바깥의 충고는 어디까지나 충고일 뿐이다. 주체적.능동적 대응은 우리 몫이다. 바깥의 논객들은 그들의 잣대와 관점으로 우리 문제를 저울질한다.

하나같이 우정어린 충고들이지만 귀담아 들을 대목도 있고 그렇지 못한 대목도 있다. 담담하게 참고해야지 천하의 명의(名醫)라도 만난 듯 과민반응은 금물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진단만 계속 요란할 뿐 대항논리 등 우리의 목소리는 좀처럼 들리지가 않는다.

왜 사카키바라와 오마에 같은 '입' 들이 우리에게는 없는가. 사카키바라는 대장성 엘리트 관료로 미국 미시간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오마에는 와세다대 공학부를 나와 미국 MIT에서 원자력공학박사학위를 받고 매킨지에 입사해 일본지부장을 지냈다. 학벌로만 따진다면 그만한 인재들은 한국에도 드물지 않다.

중요한 것은 국제적 커넥션과 국력의 '날개' 다. 사카키바라는 하버드 객원교수시절 로런스 서머스와 폴 크루그먼.제프리 삭스 등 당시 경제학계 '신동' 들과 캠퍼스에서 연(緣)을 맺었고, 오마에는 매킨지를 발판으로 일본과 아시아 그리고 마침내 국경을 뛰어넘는 경영 전략가로 뻗어났다.

글로벌체제일수록 자기PR는 중요하다. 상대방의 손짓 몸짓 하나에 시장 참여자들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앨런 그린스펀 의장의 말 한마디에 국제금융시장이 몸살을 앓는 현실이다.

우리가 의도하는 바와 지향하는 바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이해시켜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당국은 물론이고 기업과 경제계 등 경제주체들은 '해외언론기피증' 에 걸려 있다.

얼마전 서울주재 어느 영국특파원은 한 칼럼을 통해 한국경제와 기업에 대한 외국인들의 부정적 인식은 해외홍보 결여 때문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세계경영' 을 표방한 대우그룹조차 '비밀주의' 로 일관해 바깥의 비판세력들만 키워 위기를 증폭시켰다는 지적이었다.

한국의 재벌은 단점 못지 않게 장점 또한 적지 않다. 기러기떼처럼 무리를 지어 나르면 집단 양력(揚力)이 생겨 멀리 오래 날고, 세(勢) 과시효과도 있어 독수리 등 맹금류가 함부로 덤벼들지 못한다.

그러나 이 재벌체제와 그 한국적 특수성을 바깥에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입' 들은 없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재벌들의 이익집단이라면 적어도 사카키바라나 오마에 같은 국제적 인물을 한 둘 정도 배출했을 법 했다.

현실적으로 재벌의 시대가 황혼에 접어들었다면 '재벌 이후' 의 한국적 경영 패러다임도 지금쯤은 나왔어야 했다.

기존체제만 감싸안으며 시장원리와 자율만 외쳐보았자 설득력도 없고 해결책 또한 나올 리가 없다.

정부당국의 개혁 역시 '입' 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개혁을 말하는 입은 많지만 그야말로 중구난방(衆口難防)이요, 제대로 된 '입' 은 보이지 않는다.

개혁의 비전과 정책실무를 꿰뚫으며 일관성과 일체성을 갖고 우리의 의도와 진행상황을 체계적으로 바깥에 알리고 이해를 구하는 '입' 이 필요하다. 환란 이전 경제순회대사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나돌아다니며 하는 말들이 국내정책으로 뒷받침되지 않아 우리 스스로를 국제적 거짓말쟁이로 만든 적도 있다.

정부와 관변.민간 할 것 없이 저마다 국제적인 스타를 키우고 사회적.국가적 차원에서 이들을 적극 뒷받침해야 한다.

우리 입은 굳게 다문 채 우리경제의 '장기판' 을 언제까지 바깥의 '훈수꾼' 들에게 맡겨둘 작정인가.

변상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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