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는 다양한 시점 - 뮤지컬 ‘어쌔신’

중앙일보

입력


뮤지컬 ‘어쌔신(ASSASSINS·암살자들)’은 관객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다. 인터미션 없이 이어지는 2시간의 공연은 좀처럼 느슨해질 틈을 주지 않는다.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은 13명. 그 중 9명이 암살자다. 링컨 암살범 존 윌크스 부스(1865)부터 레이건을 저격하려 했던 존 힝클리(1981)까지, 미국 대통령에게 총을 겨눈 이들의 이야기가 ‘역사’가 아닌 ‘암살자들’의 시각으로 전개된다.

무대를 들락거리는 그들에겐 ‘대통령 암살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는 것 이외에 시·공간적인 공통분모가 없다. 관객은 등장인물마다 달라지는 사건과 사연에 집중해야 하는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 해설자격인 발라디어(최재웅·이경수)가 극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부르는 넘버는 가사가 빨라 자칫 놓치기 십상이다. 미국의 역사와 대통령, 기본적인 배경지식이 없다면 사건과 사연의 이면 읽기 또한 녹록지 않다.

극중 암살자들의 리더 역할을 하는 부스(강태을)는 16대 링컨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쏜다. 남북전쟁에 대한 불만과 애국심에서다. 그는 ‘조국(남부)을 죽인 놈(링컨)을 죽인 것’이라며 ‘역사가 내 의도를 왜곡하지 않게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지만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며 불평을 늘어놓던 사무엘 비크(한지상)는 37대 닉슨 대통령 재임시절인 1972년 2월,항공기를 공중납치해 백악관으로 자폭하려다 실패한다.

이렇듯 공연은 ‘왜 대통령을 쏘았는지’를 들추는 데 관심을 둔다. 아무도 출판해 주지 않는 자신의 책 홍보를 위해, 친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사랑하는 애인의 말에 사람들이 귀 기울이게 하기 위해, 숭배하던 여배우의 전화 한 통을 받기 위해, 그들은 총을 든다.

공연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암살자들의 넘버 ‘우린 권리가 있어(Everybody’s Got the Right)’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이들’이 절망을 견디다 못해 택한 해방구가 바로 대통령 암살인 것이다. 그 속엔 미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녹아있다. 작품은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암울하고 비틀린 그들이 대통령에게 총을 겨누기까지의 과정이나 신념이 관객을 설득하기엔 다소 미약하다. 그랜드피아노 두 대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소극장 무대에 적잖은 등장인물이 들락거리느라 복잡해진 동선도 공연 내내 신경 쓰인다.

어쌔신은 미국 뮤지컬계의 거장 스티븐손드하임의 대표작이다. 1990년 뉴욕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초연돼 73회 공연이 전회 매진됐다. 2004년 브로드웨이로 무대를 옮겨 토니상 5개 부문을 휩쓸었다. 국내에선 2005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암살자’라는 제목으로 첫선을 보였다.

공동제작사인 뮤지컬해븐과 오디뮤지컬컴퍼니는 극에 대한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이번 공연에선 초연(600석) 때와 달리 소극장(230석) 무대를 선택했다. 무대와 객석의 물리적 거리가 좁혀진 만큼 관객은‘배우’가 아닌 ‘배역’에 더 몰입할 수 있다.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세상을 향해 욕을 내뱉다 흐느끼다 껄껄대는 비크 역 한지상의 흔들리는 눈빛을 읽기에 적당한 거리다. 10인조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던 초연에서의 음악도 단 두 대의 피아노 연주에 맞게끔 편곡됐다.

강태을·최재웅·이창용·한지상 등 최근뮤지컬 무대에서 활약이 두드러진 젊은 배우들이 출연한다. 11월 8일까지. 신촌 더 스테이지. 전석 5만원.

[사진설명]어쌔신엔 링컨 암살범 부스부터 레이건을 저격하려 했던 힝클리까지 9명의 암살자가 등장한다. 절망을 견디다 못해 그들이 택한 해방구가 바로 대통령 암살이다.

▶ 문의= 1588-5212

[사진제공=뮤지컬해븐·오디뮤지컬컴퍼니]

< 김은정 기자 hapia@joongang.co.k >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