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4시40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오거리. 교통 정리를 하던 용산경찰서 소속 김용복(50) 경위·정동섭(45) 경사·김동형(37) 순경 앞으로 은색 소형차가 급정거했다. 잠시 후 운전석에 있던 정모(34·여)씨가 차 밖으로 뛰쳐나왔다. “돈 4000만원이 든 가방을 화장실에 두고 나온 것 같아요. 이 일을 어떡해….”
정씨는 이날 새로 산 집의 융자금을 갚으려고 수표와 현금 4000여만원이 든 가방을 챙겨 은행으로 가던 중이었다. 길을 잃어 1시간 넘게 헤매다 한 살, 세 살 된 두 아들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보채 차를 남산 국립극장으로 돌려 화장실에 갔던 게 화근이었다. 두 아들을 챙기느라 돈이 든 가방을 세면대 위에 올려놓은 채 차에 다시 올라탔던 것이다.
정씨는 10분여를 달렸을 때야 비로소 가방을 화장실에 두고 온 사실을 알아차렸다. 차를 돌려야 할지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 할지 당황하던 순간 정씨는 교통 정리 중이던 순찰차를 발견하고 차를 세웠다.
자초지종을 들은 김 경위는 김 순경과 함께 순찰차에 타고, 정 경사에게 정씨의 차를 대신 몰게 했다. 안절부절못하는 정씨에게 운전을 맡기는 게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순찰차 운전대를 잡은 김 순경은 사이렌을 켠 채 중앙선을 넘어 방향을 틀었다. 국립극장으로 올라가는 길에선 차가 많아 중앙선을 물고 달리기도 했다. 김 순경은 “400만원도 아니고 그 큰돈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서너 차례 이상 중앙선을 침범하고 신호를 위반했다”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뒤따르던 정 경사는 정씨에게 국립극장에 전화를 걸게 했다. 화장실에 가방을 놓고 왔다며 있는지 확인을 부탁하게 한 것이다.
곡예운전을 하며 3분여 만에 국립극장에 도착한 김 순경에게 정 경사가 무전을 했다. “김 순경, 화장실 말고 고객센터로 가.” 국립극장 직원이 화장실에서 가방을 찾아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20분쯤 뒤 도착한 정씨는 가방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산 국립극장 화장실에 돈 가방을 두고 온 지 30분 만에 경찰관 3명의 도움을 받아 가방을 회수한 것이다.
정씨는 “집을 계약한 후 잔금도 모두 치르고 융자금만 남은 상황이었는데 돈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며 “내 일처럼 남을 도와주는 경찰을 만나고 보니 세상이 그렇게 각박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정씨는 9일 되찾은 돈을 가지고 은행에 가 융자금을 갚았다. 다음 주엔 새 집으로 이사를 간다.
정선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