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 높은 투표율 보여…유엔직원 한명 피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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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딜리 (동티모르) =진세근 특파원]주사위는 던져졌다.

동티모르의 장래를 결정할 역사적 주민투표는 30일 오후 6시30분 (한국시간 오후 7시30분) 85%라는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며 예상 밖으로 평화롭고 공정한 분위기 속에서 마감됐다.

일부지역에서 유엔 관리가 피살되는 불상사도 발생했지만 친인도네시아 민병대의 위협도 독립을 향한 동티모르 주민들의 염원을 꺾지는 못했다.

동티모르 독립 찬반 주민투표는 몇 건의 폭력사태가 발생하긴 했지만 대체로 질서정연하게 평화적으로 치러졌다.

동티모르 전역 8백50개 투표소에는 유권자들이 이른 새벽부터 몰려들어 장사진을 쳤다.

웃고 박수치고 노래하는 주민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를 연상시켰다.

투표 나흘 전 민병대와 독립파간에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던 클루훈 지역 마사우 초등학교에서 만난 도밍고스 카스트로 (18) 는 "드디어 메르테카 (자유) 다" 고 외쳤다.

인도네시아 통합파가 주류인 판라이 클라파 마을 투표소의 분위기는 시종 험악했다.

독립이 결정될 경우 삶의 터전을 잃게 된다는 우려 때문인지 주민들 사이에서는 '자치 쟁취' '독립 타도' 등의 구호도 자주 터져나왔다.

자치파 정당인 동티모르자치연합 (FPDK) 소속이라는 마르틴스 조아호 (24) 는 "독립이 되면 많은 피가 흐를 것" 이라고 말했다.

동티모르 주도 딜리 남서부 에르메라에서는 투표 마감 직후 독립파와 통합파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져 이 과정에서 동티모르 출신 유엔 관리 1명이 흉기에 찔려 숨졌다.

동티모르 독립운동 지도자 3인도 독립을 향한 소중한 한표를 행사했다.

인도네시아 당국에 의해 가택연금 중인 독립지도자 샤나나 구스마오는 자카르타의 유엔 투표소에서 1천여명의 동티모르 망명자들과 함께 투표에 참가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카를로스 벨로 주교도 딜리의 자택 인근 투표소에서 세계 각국 기자들의 열띤 취재경쟁 속에 투표를 했다.

동티모르 출신 독립운동가이며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주제 라모스 오르타는 망명지인 호주 시드니 근교의 투표소에 나와 승리를 장담하며 소중한 권리를 행사했다.

친인도네시아 민병대 지도자인 유리코 구테레스도 벨로의 투표소에서 투표권을 행사한 뒤 "선거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며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 치하의 자치를 거부할 경우 내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했었다.

B J 하비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수시로 상황보고를 받는 등 투표과정을 주시했다.

하비비 대통령은 앞서 29일 TV연설을 통해 동티모르 주민들에게 인도네시아 연방내 자치를 택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인들의 시선이 모두 차가운 것은 아니었다.

재야단체인 '헌법개정을 위한 인도네시아연합' 소속 사디킨 욜비 (54) 사무총장은 "인도네시아의 군부독재와 제도적 부패는 동티모르뿐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민주세력들도 똑같이 박해했다" 고 강조했다.

동티모르 독립을 전세계적 '반독재.반외세 투쟁' 의 맥락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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