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커스] 젊은 피 수혈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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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국민회의 기득권 포기, 신진인사와 공동 창당' . 19일자 신문 1면에 나온 기사제목이다.

개혁 보수세력과 건전한 혁신세력을 포괄하는 개혁적 국민정당을 추진하겠다는 여당쪽 성명이 발표된 것이다.

기성 정치계에 염증을 느끼는 서민의 눈으로 보자면 환영해야 할 소식임에도 어쩐지 불신감이 먼저 앞선다.

구체적인 실행사항에 대한 내용은 없이 화려한 수사로 일관된 성명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와 비슷한 발표를 우리는 오래 전부터 들어왔다.

지난 3월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발언했던 '젊은 피 수혈' 에 관한 내용도 같은 맥락이었다.

당시 金대통령은 '정치권에 젊은이들을 새로 수혈해 새 기풍을 진작하는 방향으로 정치발전을 하는' 정계개편에 관심이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해 기삿거리를 제공했었다.

기억해보면 지난 87년 13대 대선때부터 '젊은 재야세력의 영입' 에 대해서는 정당별로 꾸준히 거론돼왔던 것 같다.

김영삼 (金泳三) 전 대통령 역시 재야세력뿐 아니라 각계에서 이름난 '젊은 피' 들을 수혈했었다.

노동계의 유명한 투사나 법조계의 유명한 검사.변호사 출신, 더 나아가 방송 연예계의 유명한 이들이 정치권에 뛰어든 것도 그 즈음부터다.

그런데 '젊은 피 수혈' 이라는 말은 처음 들을 때부터 상당히 석연치가 않았다.

대개 수혈이라는 것은 과다한 출혈 뒤에 혈액량을 회복하기 위해, 또는 헤모글로빈치 (値)가 낮은 빈혈의 경우에 사용하는 치료방법이다.

수혈이라는 말이 쓰이니 기존 정치계를 인간의 몸이라고 비유하자면 촉망받는 젊은 지식인들이 그 몸의 손가락이나 발가락도 되지 못하고 기껏 빈혈치료제로 쓰인다는 얘기일까. 어쩐지 우매한 폭군이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청춘남녀의 생피를 받아 마셨다는 옛얘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아마도 그 후에 그렇게 수혈된 젊은 피들의 활동모습을 보면서 더욱 굳혀진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노동운동가 출신의 국회의원은 노동법 개악에 앞장서고, 학생운동가로 이름을 날렸던 장관은 시위반대를 위한 공문서를 각 학교에 나눠주었으며, 투옥생활을 마다하지 않고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이들은 국회에서 당권을 위한 몸싸움을 서슴지 않았다.

얼마 전 있었던 국회회의장에서의 축협회장 할복사건 당시 그 당혹스러운 기사를 읽으며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후반 부분이었다.

…농수산위원장은 신 (愼) 회장이 실려간 뒤 상기된 표정으로 일어서서 "빨리빨리 진행하자" 고 외친 뒤 "이의없습니까" 라고 의원석을 향해 물었다.

의원들이 한마디도 못하는 가운데 위원장은 "통과 됐음을 선언한다" 고 방망이를 두드렸다….

그 자리에서 한마디도 못하고 방망이 소리를 들었던 이들 중에도 분명 젊은 피들은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껏 '수혈된 젊은 피' 들이 그들의 아름다운 경력과는 상관없이 정당의 거수기로 전락하는 예를 너무 많이 보아왔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된 이유는 물론 개개인들에게 일차 책임이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결국 그들을 홍보용으로밖에는 여겨주지 않은 기성 정치인들에게 있을 것이고, 그 기성의 권위에 대항할 수 없게 만드는 정치시스템에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젊은 피 수혈은 1+α가 되고 1+1이 됐지만, 여전히 문제의 정치시스템에 대해서는 어떤 구체적인 변혁의 내용이 나오지 않고 있다.

젊은 피의 숫자가 많아지면 그나마 발언권이 세지지 않겠느냐는 낙관론도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피와 관계된 이야기 중에 가장 유명한 드라큘라의 속성을 아는가.

드라큘라에게 피를 제공한 자는 드라큘라와 같은 종족이 돼버리고 만다.

어차피 국민이 뭐라 말하거나 말거나 신당은 창당되는 방향으로 나갈 모양이니까 다시 한번 희망을 걸어보는 쪽을 택하기로 한다.

부디 신당추진체 (개혁정치를 위한 추진위원회) 를 비롯해 신당참여에 관심있는 이들이 제 몫을 해주기 바란다.

앞으로 젊은 피나 α나 1이 될 이들은 부디 초심을 잃지 말아주길 바란다.

그리고 벌써부터 반발 기미를 보이고 있는 기성정치인들은 기존 정치판의 고질적 병폐를 없애기 전에는, 제아무리 젊은 피를 수혈해봐야 불치병이 치료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한다.

또 다시 젊은 피들이 거수기의 하나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국민 중의 상당수는 드라큘라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을 되살리게 될지도 모른다.

송지나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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