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채권시장 질서 잡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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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자금난에 몰린 기업들의 회사채 1조7천억원어치를 허가 없이 사고팔아 5백30억원을 챙긴 증권사 회장이 구속돼 충격을 주고 있다.

종금사들은 앉아서 수수료만 챙기며 서류상 합법거래로 위장해주었고, 투신사 간부들은 억대의 사례비를 받고 이들을 비싸게 사주었다니 놀라움은 더한다.

국제통화기금 (IMF) 사태 초기 기업 자금난을 악용해 '떼돈 번 사람이 적지 않다' 는 항간의 풍설이 사실로 입증됐다.

구속된 세종증권 회장 김형진 (金亨珍) 씨는 회사채발행기업과 제2금융권을 오가며 하루만에 수십억원의 매매차익을 챙기는 수완을 발휘해 '채권 귀재' 로 통했다고 한다.

명동의 사채 중간수집상 (속칭 나까마) 이 어떻게 채권시장에서 떼돈을 벌어 40세에 증권사의 경영인으로 벼락출세 할 수 있었을까. 그만큼 국내 채권시장이 허술하고 구조적인 문제점이 많았다는 얘기가 된다.

채권시장은 주식시장과 함께 자본시장의 근간을 이룬다.

현재 채권발행 잔액은 3백40조원에 이르며 거래량은 지난 7월말 현재 5백조원에 달한다.

그럼에도 전체 거래의 90% 이상이 지금도 장외에서 이뤄지고 있다.

채권은 그 종류가 1만2천종이 넘고 만기와 발행금액.이자율.이자지급 방법 등이 각양각색이어서 주식처럼 거래소로 한데 모아놓기가 극히 어렵다고 한다.

장외에서 1대 1 거래가 대부분이어서 검은 돈을 매개로 한 불공정거래의 소지는 그만큼 많아진다.

더구나 회사채를 발행하려는 기업은 많은 데 반해 이를 사주려는 투자기관은 항상 적다.

이에 따라 브로커들은 자신이 사들인 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투신사에 넘기면서 차익을 취하고, 투신사 간부들은 회사 장부에 기록하는 가격보다 낮은 가격에 이를 매입해 그 차액을 브로커들과 나눠먹는 방식으로 비리가 저질러지는 것이다.

이런 음성적 부패고리를 차단시키지 않는 한 채권할인비리 (非理) 의 재발은 피할 수가 없다.

장내거래를 활성화해 거래의 투명성을 높이고 유통체계를 개선해 공정한 가격형성을 유도함으로써 브로커들의 난립을 막아야 한다.

최대 매입기관인 투신사들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기관 횡포의 시정도 당면과제다.

기업의 자본조달시장으로서의 채권시장의 중요성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다.

당국과 시장 당사자들은 이번 비리사건을 국내 채권시장의 후진성을 극복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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