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이홍구 칼럼

‘핵무기 없는 세계’와 한반도 비핵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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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시도로 미·북 대화의 가능성이 부상하면서 과연 그것이 과거의 협상과는 다른 새로운 역사적 함수를 내포하고 있는지 주목하게 된다. 북한의 핵 폐기는 ‘핵무기 없는 세계’를 바라는 인류의 꿈을 실현하려는 첫걸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미국이 스스로의 역사적 사명을 이행하기 위해 얼마나 충실할 수 있는지, 또한 북한은 과연 이러한 미국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응할 수 있는지 하는 어려운 전제가 충족돼야만 할 것이다.

미국의 유일 초강대국 시대가 지나가고 있는 지금,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지속적으로 행사해 왔던 미국의 리더십은 군사력이나 경제력 못지않게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기수(旗手)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야만 유지 가능할 것이다. 즉 인류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지구온난화와 핵무기 확산에 제동을 거는 시대적 사명에 앞장서 나아갈 때 미국은 계속 국제사회에서 첫 번째 리더 자리를 지켜 가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국내외 산적한 과제에 포위된 가운데서도 ‘핵무기 없는 세계’로 확신에 찬 첫걸음을 내딛는 것을 보며 우리는 인류사회의, 그리고 미국의 앞날에 큰 기대를 걸게 되는 것이다.

취임 100일 만에 핵무기 감축 및 핵확산 통제 노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프라하 연설을 시작으로 오바마 대통령은 러시아와 관계 개선 및 미·중 전략 대화를 통해 내년 5월로 예정된 핵확산금지조약 재검토회의에 일찌감치 역사적 중요성을 부과했다. 또한 유럽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의 유대 강화와 영·독·프·러와의 공조로 이란 핵 프로그램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 가는 한편, 북한에 대한 안보리 제재 결의안 1874호를 일관성 있게 집행해 나가는 과정이 핵확산 금지에 대한 그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다만 유럽 중심부의 지근거리에서 만약 북한과 같은 핵·미사일의 위협이 벌어진다면 과연 미국은 지금과 같이 여유 있는 대응으로 일관할 것인지에 대한 일말의 의문과 아쉬움이 동맹국인 일본과 한국 시민들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미국의 새 정부 출범 이래 힐러리 클린턴 국무부 장관, 제임스 스타인버그 부장관 등이 북한 핵 폐기에 대한 일관성 있는 입장을 천명하고 있는 것은 마땅히 평가돼야 한다. 머지않아 평양을 방문할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 특사는 무엇보다 앞으로의 미·북 협상은 지나간 게임의 연장전이 아니라 새로운 목표를 위한 새 노력이라는 것을, 그리고 새 대통령은 새 비전과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설명하고 북한이 이에 긍정적으로 적응하는 게 상호 간에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는 유일한 길임을 설득하리라고 기대된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남조선혁명을 통한 통일이란 환상과 미국의 한국 및 일본과의 동맹 관계 포기라는 비현실적 기대를 접는다면 북한 체제의 안전과 경제 발전을 미국뿐 아니라 6자회담 당사국들이 함께 보장하겠다는 문제 해결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오바마 대통령의 의지와 정치력에 대해서도 설명하리라고 믿는다.

북한은 어렵더라도 지혜로운 결단을 내린다면 실리와 명분 양면에서 큰 소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사의 예외 지대가 되는 것, 즉 고립의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지는 더 이상 지적할 필요도 없다. 핵무기의 처참한 세례를 받은 유일한 나라 일본의 새 총리가 아시아 공동체를 주창하고, 건국 60년을 맞은 중국이 개방을 통한 지속적 발전을 다짐하고 있는 세상이 아닌가. 비핵화의 명분으로 말하자면 ‘핵무기 없는 세계’를 추구하는 인류의 행진에 앞장서는 데 더해 우리 스스로 남과 북이 자주적으로 1992년 채택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재확인하고 민족적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면 되는 것이다.

‘남과 북은 한반도를 비핵화함으로써 핵전쟁 위험을 제거하고 우리나라의 평화통일에 유리한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며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전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아니한다’고 선언한 데 이어 ‘남과 북은 핵 에너지를 오직 평화적 목적에만 사용한다’고 약속했다. 그동안 ‘미국의 반공화국 적대시 정책’ 때문에 비핵화 공동선언의 이행이 어려웠다면 미·북 대화와 6자회담을 통해 ‘적대시 정책’의 문제를 하루속히 해소하고 비핵화 공동선언과 기본합의서를 바탕으로 남북 공존 관계의 새 장을 열어야 한다. 이산가족 상봉의 기쁨과 아픔을 얼마나 더 되풀이해야 되겠는가. 지금이 바로 민족의 장래를 위한 결단의 시간이다.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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