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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자식 같은 술’ 복원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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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소나무 외로운 주막에 한가롭게 누웠으니 별세상 사람일세(寒松孤店裡 高臥別區人)
산골짝 가까이 구름과 같이 노닐고 개울가에서 산새와 이웃하네(近峽雲同樂 臨溪鳥與隣)
하찮은 세상 일로 어찌 내 뜻을 거칠게 하랴. 시와 술로써 내 몸을 즐겁게 하리라(銖寧荒志 詩酒自娛身)
달이 뜨면 옛 생각도 하며 유유히 단꿈을 자주 꾸리라(得月卽帶憶 悠悠甘夢頻)
―김삿갓‘스스로 읊다’(自詠)

세속에 물들지 않고 시와 술로 근심을 잊으며 자연과 함께 살아간 김삿갓의 시다. 지난 달 25일 찾아간 경기도 성남에 있는 국순당 연구소는 시름을 잊고 술만 빚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인근의 동산은 문헌 속에 갇혀있던 조상의 술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기운이 감도는듯 했다.

“너무 안타깝다. 조선시대까지 이어져오던 우리의 술들이 자취를 감췄다. 프랑스의 와인, 독일의 맥주, 일본의 사케는 각 지방마다 특색있는 술이 이어져 문화국가를 이루지 않았나.”

국순당 ‘우리 술 복원 프로젝트’ 부소장 신우창 박사(41ㆍ분자유전학 전공)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선시대엔 600여가지의 가양주(家釀酒ㆍ집에서 빚는 술)가 있었다. 당시 술은 각 가정에서 김치와 된장처럼 직접 담궈 먹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일제 치하의 주세 정책 때문에 가양주는 대부분 사라졌다. 해방 후엔 복원이 쉽지 않았다. 보릿고개 시절, 밥 해먹을 쌀도 없는데 담글 쌀이 어딨었겠나.

“그때 우리 술의 뿌리가 끊겼다. 술 제조법만 없어진 것이 아니다. 술을 마실 때의 예절, 화합과 화해의 문화, 풍류의 멋이 없어진 것이다. 숭례문이 불탔을 때 온 국민의 마음이 아팠다. 그것과 똑같은 마음이다. 옛 문화의 한 부분을 복원해낸다는 의미에서 3년 전부터 ‘우리 술 복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프로젝트의 첫 결실은 지난해 5월 단오를 맞아 내놓은 창포주였다. 고려 때부터 전해오는 술이다. 창포 뿌리를 잘게 썬 다음 이를 그늘과 햇볕에 말려 명주 주머니에 넣고 청주 한 말을 담가 봉해둔다. 석 달 후 푸른 빛이 보이면 생동찰 1말을 푹 쪄서 익혀 덧넣고 7일 후에 마시는 술이다. 이 술을 마시면 36가지 병이 저절로 없어진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연구소에서는 창포주를 포함해 지금까지 총 9가지의 술을 복원해냈다.

15명의 연구원을 거느리고 있는 연구소는 ‘1년 1인 1주 복원’을 목표로 내걸었다. 문헌은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의『임원십육지』등을 참고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농업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엔 170여가지의 술 제조법이 등장한다. 원칙적으로는 매달 전통주 하나씩 나올 법도 하지만 내부 시음 평가에서 불합격을 받으면 세상에 내놓지 않는다.

“원전에 나오는 대로 만든 뒤 초기 레시피를 작성한다. 이후 10여 가지의 변형 레시피를 만들어 술을 만든 뒤 회의를 한다. 어떤 레시피가 문헌에 가장 가까운지를 두고 본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최대한 가깝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마셔봤을 때 문헌에 나오는 느낌이 나지 않으면 바로 버린다.”

문헌에 나온 맛을 그대로 내려면 주조 기술과 한문 독해력, 시대 상황, 각 시대ㆍ지역별 도량형 등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문헌 상의 제조법을 무시하면 복원도 여지없이 실패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제조법이라도 그대로 따라하면 술이 됐다. 신 박사는 동정춘을 복원할 당시 ‘물은 한 사발만 넣는다’는 표현을 예로 들었다.

“술은 물이 원료인데 고작 한 사발을 넣어서 과연 술이 만들어질까 싶었다. 그대로 따라했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도 뻑뻑한 덩어리 상태였다. 포기한 상태로 방치했는데 한 달 뒤 뚜껑을 열어보니 열대 과일향이 나는 술이 돼 있었다. 고체 발효의 술이었던 것이다. 또 동정춘은 ‘날물과 철로 만든 그릇은 피한다’고 적혀있다. 끓인 물을 식힌 뒤 넣고 쇠로 된 그릇에는 담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이대로 따라했다.”

그러나 그는 해석이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고 토로했다. “약산춘 제법에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 나뭇가지로 휘휘 저어주라’고 나오는데 이는 어떤 뜻이 담겼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동쪽의 가지가 기운을 북돋아준다’ 정도의 의미로 해석해 스테인리스 막대기 대신 나뭇가지를 꺾어 저었다.”

연구원들은 문헌의 술이 개발됐다고 판단되면 메뉴 개발팀에 이를 넘겼다. 메뉴 개발팀에선 술이 빚어질 당시를 고려해 안주를 만들었다. 주안상이 차려지면 연구원들은 한자리에 모여 최종 시음 평가를 한 뒤 의견을 교환했다. 이때가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 아닐까.

“맛을 본 뒤 평가를 해야 하니까 진지하게 술을 마신다. 한 잔씩 넘기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혀끝으로 맛만 본다. 또 대부분 고춧가루가 나오기 이전의 술들이라 매콤한 안주는 없다. 주안상이 차려지니 좋을 것 같지만 담백한 음식들만 나와 꼭 그렇지도 않다.”

연구팀은 요즘 상심소주와 쌀머루주를 만들고 있다. 상심소주는 오디, 쌀머루주는 포도가 주원료다. 신 박사는 “보랏빛을 띠는 상심소주를 마시면 눈이 밝아진다고 한다. 쌀머루주는 양주자사(당나라 벼슬)의 자리까지 바꿀 만큼 맛이 좋다고 문헌에 나와있다”며 “연말께 국순당 음식점을 통해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우리 술의 다양성을 회복하고 보다 많은 사람이 전통주를 마실 수 있게 복원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 한식세계화 프로젝트와도 연계해 우리 술 문화를 널리 알리겠다”고 말했다.

◇이화주(梨花酒)=고려 때부터 양반가에서 즐겨 마셨다고 전해지는 술. 숟가락으로 떠먹을 수 있을 정도로 걸쭉하고 벨벳처럼 매끄러운 고급 막걸리다.

◇자주(煮酒)=청주에 황랍과 호초(후추)등의 한약재와 꿀을 넣어 만든 술. 차게 식혀 마시는 약주로 매콤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준다.

◇신도주(新稻酒)=조선 후기부터 추석 차례상에 올리던 절기주. 햅쌀로 빚는 술로 약간 매운 맛과 신맛, 단맛이 조화를 이룬다.

◇송절주(松節酒)=조선시대 선비들이 즐겨 마시던 고급 약용주다. 겨울철 한파 속에서도 강직함을 잃지 않은 소나무 마디(송절)를 삶은 물과 쌀로 빚었다.

◇소곡주(小酒)=백제 왕실에서 마시기 시작해 조선시대까지 음용된 술. 누룩이 적게 들어가 이같이 불리며 ‘한번 마시면 일어나지 않고 계속 마셨다’고 전해져‘앉은뱅이술’로도 불린다.

◇동정춘(洞庭春)=‘평생 한번은 마셔야 한다’고 전해내려오는 술. 쌀 4.4㎏에서 술 1ℓ만 나올 정도로 귀했다. 과실향이 섞여 향긋하고 입에 달라붙는 느낌이 일품이다.

◇약산춘(藥山春)=‘약주’의 유래가 되는 술. 정월 상해일에 쌀과 누룩으로 빚어 늦봄이나 여름에 먹는 술로 100일 정도 발효시켜 마신다. 저온 장기 발효법으로 맛이 깔끔하다.

◇미림주(美淋酒)=증류식 소주에 찹쌀과 누룩을 넣어 빚은 술. 알코올 도수가 높지만 술맛이 부드러워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가 즐겨 마셨다.

위 좌측부터 약산춘, 신도주, 창포주, 동정춘, 소곡주, 자주

글ㆍ사진=이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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