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권 vs 공익 … 끊임없는 송전탑 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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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최모(41)씨는 지난해 말 한국전력으부터 뜬금없는 통보를 받았다. 최씨가 소유하고 있는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본두리의 29만7522㎡(9만 평) 땅 한가운데에 송전탑 1기가 들어선다는 것이었다. 이 땅은 30년 이상 최씨 일가 소유였다. 한전은 여주군 일대의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대비하기 위해 송전탑 건설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다른 곳으로 지나갈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문의했지만 “지형·인적 등을 고려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곳은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문제는 송전탑만이 아니었다. 15만4000㎸의 고압선이 그의 땅 절반을 가르며 지나가게 됐다. 최씨는 이 땅에서 한우 300여 마리를 키우고 있다. 앞으론 펜션과 전원주택을 지을 계획이었다. 수천만원을 들여 길을 닦아 놓았고, 건물이 들어설 부지의 기초 공사도 끝난 상태였다. 최씨는 “고압선 아래에서 누가 쉬고 싶겠느냐”며 “사실상 사업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하지만 한전 측은 “개인 땅이 이렇게 많이 포함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면서도 “공익을 위한 일이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사업 승인이 됐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송전선로 건설을 두고 한전과 지역 주민들의 갈등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전기 공급이라는 공익과 개인의 재산권이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30일 한전에 따르면 2009년 들어 8월까지만 44건의 민원이 접수됐다.

주민들은 송전선로 건설로 인한 재산권 침해를 님비 현상과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근에 혐오시설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유지에 송전탑 같은 거대 구조물이 직접 들어서기 때문이다.

최씨의 경우, 한전은 송전탑 1기 건설과 건립선하(고압선이 지나는 아래 부분의 땅)에 대한 보상으로 2억원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인근의 부동산 관계자는 “고속도로에 인접해 평당 수십만원을 호가하던 땅이었지만, 송전선 건설 소문이 들리면서 땅을 사려는 사람이 아예 사라졌다”며 “쉽게 말해 ‘못쓰는 땅’이 돼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1년 넘게 한전과 갈등을 겪고 있는 밀양·창녕 지역의 우일식 주민대표는 “밀양에서 어떤 사람이 5억원짜리 펜션을 지었는데 그 위로 송전탑이 생겨 1000만원의 보상을 받았지만 사업이 망했다”며 “재산권 침해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사업 추진 과정에서의 한전의 일방적인 태도도 주민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사업 시행 전에 하는 주민설명회는 이미 결정 난 사업을 진행하겠다는 통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토지주들에겐 개별적으로 연락조차 하지 않는다. 최씨 역시 주민설명회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

송전선로 건설을 둘러싸고 갈등이 끊이지 않자 국회에서 법률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한나라당 조해진 의원은 전원개발촉진법 개정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현행 전원개발촉진법에는 송전선로 부지 선정과 보상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개정안은 사업을 진행 전에 기초단체장의 의견을 수렴하고, 재산권 침해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보상을 강화하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한다. 조 의원은 “현재 송전선로 사업은 시행 사업자가 자체적으로 부지 선정과 보상을 진행하고 있다”며 “명확한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주민들의 경제 손실 등 불안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주영·이현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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