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봤습니다] 박정식 기자의 수원 영화초등학교 디자인 수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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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교육이 진화 중이다. 장르별 이론을 배워 따라 하던 과거의 미술 수업에서 벗어나, 학생들 스스로 작품을 창안하고 구현·활용해 보는 수업으로 바뀌고 있다. 디자인 교육이 학교 현장에 도입되면서부터 나타난 모습이다. 이 시간만큼 학생들은 아이디어 창작자가 되고, 교사는 지식 전달자에서 길잡이로 변신한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의 한국청소년디자인전람회에서 2년 연속 으뜸디자인학교로 선정된 수원 영화초등학교의 디자인 수업 현장을 찾아갔다.

수원 영화초 4학년 4반 학생들이 디자인 수업의 하나로 만든 안내표지판을 들고 자랑하고 있다. [최명헌 기자]

명상·율동으로 상상력과 창의력 자극

지난 23일 수원 영화초 4학년 4반 교실. 오전 10시30분, 미술 시간이 되자 학생들은 5~6명씩 책상을 서로 붙이고 그룹을 지어 모여 앉았다. 계란판·우유팩·과일 포장용기 등 재활용 소재부터 은박지·도화지·색종이 그리고 화분·돌멩이까지 준비해온 갖가지 재료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학생들은 자신이 구상해온 재료의 쓰임새를 친구들에게 자랑하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이날 과제는 ‘재활용품을 활용한 안내표지판 만들기’다. 수업에 앞서 이철규(45) 교사는 학생들과 함께 율동을 하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를 불렀다. 단전호흡과 3분 명상 시간을 가지고, 우리나라 기업이 만든 LCD TV가 전 세계 판매 1위에 올랐다는 내용의 동영상도 시청했다. 이 교사는 “성공 요인은 디자인 때문”이라며 학생들의 학습동기를 북돋웠다. 그는 “긴장을 풀고, 감성을 담당하는 우뇌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활동”이라며 “상상력과 창의력을 자극해 창작 활동을 왕성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친구들과 자유롭게 토론하며 협력

학생들이 이정표 제작에 쓸 계란판을 찢고 있다.

학생들은 제작에 앞서 그룹별로 토의를 했다. 각자 준비한 아이디어들을 꺼내 서로 장단점을 비교하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정표를 만들기 위해 친구와 협력하는 첫 단계다. “이 색깔이 눈에 띄어 좋지만 너무 짙어 글씨를 읽기가 불편하잖아.” “맞아, 주변 환경과도 어울리지도 않고.” “꽃 모양 화분처럼 꾸미면 어떨까, 정원과도 잘 어울리고 안내 기능도 할 수 있고.” “그럼 비에 젖지 않게 은박지를 이용해야겠는데.” “가지를 튼튼한 막대로 만들어야겠다.”

토론 전 “예쁘고 쓸모 있어야 한다”며 심미성과 기능성을 강조한 선생님의 말에, 학생들은 아이디어와 설계도를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머리를 짜냈다. 교실은 순식간에 시장처럼 변했다. 다른 팀의 토의 내용을 듣고 와 전하기도 하고, 흥정하듯 아이디어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기도 했다. 몇몇은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분류하거나 없는 재료를 옆 팀에서 빌려오기도 했다. ‘물방울팀’ 팀장 권두현(11)군은 “어수선하지만 서로 토론하며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이 수업이 즐겁다”고 말했다.

공동제작 때 각자 맡을 역할도 자연스럽게 분배됐다. 권군은 팀원들의 의견을 모으고 제품의 제작 방향을 감독했다. 김유리양은 재료 선별과 사용 순서를 정하고, 박재성군은 설계도와 밑그림을 그렸다. 이진우군은 제작 단계와 조형 계획을 짜고, 김채림·오선민양은 장식을 만들었다.

장애 친구들도 함께 하는 통합수업

학교 정원과 조화를 고려해 학생들이 디자인한 학교시설 이정표.

디자인 수업의 가장 큰 소득은 학생과 교사의 역할 변화다. 기존에는 교사의 이론 설명, 유명 작품 감상, 실습에 그치는 수업이었다. 따라 하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것. 디자인 수업은 그 틀을 깨고 학생들에게 지휘봉을 줬다. 미술 수업 때 익힌 기본 공작기술을 활용해 자신의 상상을 실물로 구현하는 기회를 체험해 보게 했다. 상상에만 그치지 않고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실용성을 함께 고민하도록 변화했다. 오양은 “평소엔 그냥 지나칠 폐품들을 어디에 어떻게 쓸 수 있을까 고민하고, 공공시설물을 이렇게 하면 더 편하고 실용적으로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됐다”고 말했다.

디자인 수업은 장애학생과 일반학생이 함께 어울리는 통합수업 역할도 한다. 이날 수업엔 특수학급의 최여준(가명)군도 함께했다. 최군은 글을 잘 읽지 못하는 읽기장애를 앓고 있다. 그러나 디자인 수업 땐 기발한 상상력과 정밀한 스케치 실력을 발휘한다. 종이 표지판이 자꾸 쓰러져 “막대기로 뒤를 지탱해야겠다”고 친구들이 말하자, 최군은 “이정표의 이미지가 훼손된다”며 “두꺼운 종이로 나무 모양을 만들어 붙이면 해결된다”고 설명했다. 따돌림은커녕 친구들과 자연스레 재료를 주고받으며 수업을 주도하고 있는 것. 이 학교에선 주의력결핍과다행동장애(ADHD)·정서장애 등을 가진 다른 학생 14명도 최군처럼 디자인 수업을 통해 일반학생들과 잘 어울린다.

교사의 역할도 달라졌다. 학생들이 창의력을 발휘하도록 옆에서 자극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도우미로 변신했다. 수업시간은 제자들의 갖가지 엉뚱한 질문들을 함께 고민하고 설명하는 시간이 됐다. 이 학교 3학년 강예서(9)양은 지난해 한국청소년디자인전람회에서 ‘해바라기 학교’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받기도 했다. 각각의 건물을 원형으로 배치한 해바라기 모양의 배치로 학생들 간의 교류를 활성화시켜 사각지대와 ‘왕따’ 문화를 없앤다는 취지를 담은 작품이다. 이 교사는 “실생활을 개선하는 창의력 디자인 수업 덕분에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박정식 기자, 사진=최명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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