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DJP합의 '마술'이었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DJP연합의 매개체였던 내각제개헌의 포기사실이 알려지자 아직도 국가 중대사가 밀실에서 음모를 꾸미듯 논의되고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많은 국민들이 올해 안에 내각제를 하고 안하고의 문제를 따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하지도 않을 내각제를 하겠다고 밥먹듯이 말한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나타난 일련의 사태는 개혁을 보수로 바꿔치려는 전주곡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내각제 개헌 보류는 우리에게 DJP의 약속 같은 것은 믿지 말았어야 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DJP에 있어 내각책임제는 마술사가 보여주는 '믿거나 말거나 쇼' 와도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거짓인줄 알면서도 눈을 비벼가며 관람하는 마술은 많은 관중에게 각자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한다.

마찬가지로 내각책임제라는 마술은 DJP를 둘러싼 구경꾼들에게는 각자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산모 (産母)가 되기에는 가임연령이 지나버렸고, 너무나도 오랜 세월을 물과 기름으로 지낸 두 사람을 엮어보려고 동분서주하던 젊은 산파 (産婆) 들이 만들어 낸 최고의 신혼여행지였었다.

유신시절 그렇게 강력한 대통령제를 옹호하던 JP가 어느날 갑자기 내각책임제를 주장하고 나온 것을 두고 그의 정치철학이 바뀌었다고 생각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에게 있어 내각책임제란 정치적 생존과 파워게임, 그리고 정치지분에 불리하거나 유리할 때 실시.보류.백지화라는 색깔을 바꿔가며 꺼내 쓰는 카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국민들의 반응이다.

오로지 내각책임제에 정치생명을 걸고 있는 듯했던 JP가 내각제를 사실상 포기했는데도 대부분 무표정한 얼굴들이다.

그저 역대 지도자들이 그러했듯이 DJ와 JP도 자신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안감힘을 쓰고 있을 뿐이라는 표정들이다.

지도자에 대한 이러한 불신과 약속위반도 그저 그렇게 생각해버리는 불감증을 누가 치유할 것인가.

특히 최근의 정치과정에서 DJ와 JP 두 사람에게는 비슷한 모습으로 닮아가는 점이 많다.

상황에 따라 논리가 바뀌는 것이 그렇고, 당내에서 리더십이 강력해 이들의 생각은 그냥 그대로가 모두 관철되는 경향도 같다.

그리고 국민회의에서의 DJ나 자민련에서의 JP의 행동양상은 마치 전제군주가 선정을 베풀 때의 모습을 하려 한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물론 세상에는 결과만 좋다면 모든 것이 용납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는 이러한 자세가 항상 바른 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결론이나 결과만이 아니라 그것에 이르는 과정 또한 중요하다.

하물며 그 문제가 당내만의 문제가 아닌 내각제개헌 같은 엄청난 문제일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아직도 국가중대사를 DJP만이 밀실에서 논의하고 있는 모습은 이들이 전제군주가 되고 싶어하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더욱이 아리송한 말투를 흘려 그 낡은 카드를 서로가 한번씩 더 쓸 속셈을 하고 있는 모습은 이제 지겹다 못해 짜증이 난다.

민주주의에 있어 지도자는 자신의 생각을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어떻게 실천할지를 투명하게 밝힐 책임도 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이 이들에게 갖는 이미지가 '언제라도 설명 한마디 없이 말을 바꾸고 약속을 어길 수 있다는 것만은 투명한 사실' 이라고 생각한다면 도대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지도자는 새로운 길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지도자가 걸으면 길이 되고, 그 길은 세월따라 문화가 된다.

지도자의 가치관은 국민의 가치관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지도자가 가지고 있는 미학적 감각은 그 시대의 색채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모든 것은 이미 그 시대의 운명과도 연결된다.

승리한 지도자만이 영향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후보가 불복선언을 하고 출마하자 그 영향력은 어린 아이들의 술래잡기에까지 미치게 됐다.

가위 바위 보에서 진 아이가 무효를 선언하는 사례까지 생긴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지도자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그 능력보다도 국민들이 믿고 기대해주는 것이다.

국민이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하고, 그가 제시한 미래의 비전을 기대해주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좋은 지도자가 되기 어렵다는 점 때문이다.

강형기 충북대교수.행정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