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아니면 '아니오' 해야지 (3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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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30) 4.19의 확산

나중 얘기이긴 하지만 이기붕의장 일가가 19일 6군단을 다녀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나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구설수에 휘말리게 됐다.

우선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강영훈 6군단장이 3.15부정 선거의 원흉인 이기붕 일가를 보호했다" 며 비난하고 나섰고 구여당인 자유당계 의원들은 또 그들대로 "갈 데 없는 이의장을 홀대해 내쫓았다" 며 나를 인간적으로 아주 몹쓸 사람인 것처럼 매도했다.

그 때는 군단 내부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참모들끼리 의견교환이 있었다고 했다.

대부분의 참모들은 '공사 (公私) 를 가려 李 의장의 보호요청을 거절해야 한다' 는 입장이었는데 전속부관인 이경빈대위의 생각은 달랐다.

李 대위가 "평소 姜 장군의 성품으로 볼 때 李 의장이 다시 온다고 해도 거절하지 않을 것" 이라고 말하자 참모들도 더 이상 논의를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소요사태는 갈수록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4월 19일 오후 1시 40분 경무대 앞에서 경찰 발포로 학생 3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로는 중.고교 학생들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휴교령을 내리고 송요찬계엄사령관 명의로 포고문을 잇달아 내놓았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특히 25일에는 서울지역의 대학교수 2백58명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는 플래카드를 들고 종로거리를 행진하는 희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른바 '교수데모' 였다.

25일 서울에서만 시위에 참가한 사람은 1만명이 넘었다.

시위대 일부는 서대문의 李의장 집을 습격해 점거하기도 했다.

그날 밤 9시쯤 됐을까. 나는 전국의 시위사태를 전하는 라디오 방송뉴스를 들으면서 군단장 숙소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보고 있었다.

책은 한운사 (韓雲史) 씨가 쓴 일제 때의 학병 체험수기였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런데 당번병이 노크를 하고 들어 오더니 "서울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잠옷 차림으로 응접실에 나가보니 이기붕의장의 차남인 강욱군이 서 있었다.

내가 깜짝 놀라 "부모님은 지금 어디 계시냐" 고 물어본즉 "지금 막 도착해 차 안에 계신다" 고 대답했다.

나는 "옷을 갈아 입을 테니 부모님을 모시고 들어오라" 고 일렀다.

옷을 갈아 입고 응접실로 나가 보니 李의장과 부인 박마리아 여사가 서 있었다.

李 의장은 나를 보자마자 언뜻 쑥스러움이 담긴 나즈막한 어조로 "또 폐를 끼치게 됐구만…" 했다.

李의장은 다리가 몹씨 불편해 보였다.

학생.시민들이 서대문 자택을 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집을 빠져 나온 것 같았다.

나는 "잘 나오셨습니다. 우선 긴급한 사태를 피하고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며 두 분에게 의자를 권했다.

바로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군단 사령부 일직사령의 전화였다.

'데모대를 가득 태운 트럭 20대가 미아리검문소를 지나 북쪽으로 가고 있다" 는 보고였다.

나는 이것이 李의장 일가를 목표로 한 움직임이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병력부족이 큰 문제였다.

트럭 한 대에 30명씩만 태운다고 해도 20대면 데모인원이 적어도 6백명은 된다는 얘기 아닌가.

당시 군단본부의 자체 병력은 1백명도 채 안됐다.

근처에 공병대가 있었지만 그 병력 역시 1백명 내외에 불과했다.

그러니 시위대 6백명이 군단장 숙소를 포위하고 압박을 가할 경우엔 李의장을 보호하는 일 자체가 힘들어질 것 같았다.

나는 부군단장 숙소를 떠올렸다.

당시 부군단장 숙소는 군단에서 북쪽으로 30분쯤 차를 달려야 닿게 되는 거리에 떨어져 있었는데 그곳에는 1개 연대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李 의장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고 '부군단장 숙소로 옮겨 가 계시는 게 좋을 것 같다' 는 의견을 제시했다.

李의장은 내 말을 듣더니 몇차례 고개를 끄덕이며 "姜군 판단대로 하는 것이 좋겠네" 하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유의준 (兪義濬) 부군단장에게 전화로 '준비를 해 놓으라' 고 지시했다.

이 모든 것이 불과 5분 내외에 발생한 상황이었다.

글= 강영훈 전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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