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칼럼] 대통령만 쳐다보면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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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과 캐나다의 3개 도시를 5박6일만에 방문하고 귀국하는 일정은 젊은 사람에게도 피곤한 일이다.

더구나 가는 곳마다 회담하고 연설하고 접견하는 대통령의 공식일정이라면 대단히 과중한 부담이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비록 건강이 좋다지만 70이 넘은 그의 고령 (高齡) 을 생각하면 상당한 무리가 됐을 게 틀림없다.

金대통령이 그런 힘든 여행을 하고 귀국한 공항 기자회견에서 마주친 질문은 특검제와 삼성차 (車) 문제였다.

상식대로라면 보통 이런 문제는 대통령에게 묻기 전에 장관이나 여당 간부에게 묻고 답이 나오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다루는 무대에서 장관이나 여당 간부의 모습이 사라진지는 오래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누구나 믿게 됐다.

대통령 자신도 그렇게 믿었기에 그 고단한 여행끝의 기자회견에서 그런 질문에 답변을 했을 것이다.

특검제를 둘러싼 공동여당의 갈등은 급기야 집권당의 총재대행이 사퇴하는 전례없는 사태를 낳았다.

대통령과 총리가 합의한 사항을 김영배 (金令培) 총재대행이 불복 (不服) 했다는 것이 표면상 그의 사퇴원인이다.

金대행이 그 합의내용을 미리 알았던들 총리에게 그렇게 대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볼 때 金대행조차 자기당 총재가 뭘 합의했는지를 몰랐다는 얘기가 된다.

이처럼 특검제나 삼성차나 모두 장관도 여당도 보이지 않고 사람들이 모두 대통령의 입만 쳐다보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총재대행까지도 총재의 뜻을 몰라 뜻밖에 경질되는 형편이다.

다른 문제라고 그렇지 않을까. 옷로비 의혹이나 파업유도 발언이 터져도, 여야협상이 꼬여도, 삼성차공장의 가동문제까지도 모두 대통령만 쳐다본다.

심지어 신문광고를 보면 걸핏하면 '대통령께 드리는 호소문' 이지 장관이나 여당은 호소대상도 아니다.이게 지금의 현실이다.

金대통령으로서도 죽을 지경 (?) 일 것이다.

혼자 어떻게 그많은 일들을 처리하고 수습하고 틀어막을 것인가.

金대통령의 청남대 구상이 뭔지는 아직 밝혀지진 않았지만 가장 시급한 과제는 '대통령만 쳐다보는' 현상부터 시정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무슨 방법이 있을까. 대통령의 큰뜻이나 탁월한 판단도 결국 조직을 통해 추진.실현할 수밖에 없다.

조직이 위축되고 무력 (無力) 하면 일은 일대로 안되고, 조직에서 해결책을 못찾는 사람들은 결국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에게 해결책을 요구하게 된다.

대통령이 직접 이런저런 일의 해결책을 찾아나서다 보면 잘되면 몰라도 잘못될 경우 흙탕물은 바로 대통령에게 튀게 된다.

무력한 조직은 으레 대통령 눈치를 살피므로 조직의 잘못까지도 사람들은 대통령을 원망하게 된다.

그러니까 조직이 살아 움직이고 제몫을 해야 대통령만 쳐다보는 일은 없어질 수 있다.

특검제라면 기자들이 여당에 묻게 되고, 삼성차라면 관계장관이 기자질문에 권위있게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공항기자회견에서 몸소 그런 질문에 답변하는 부담도 덜 수 있는 것이다.

또 여당 간부라면 당총재의 뜻을 항상 잘 알 수 있게 돼야 할 것이다.

거꾸로 총재도 여당의 뜻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혼선을 막을 수 있고 이번과 같은 사퇴파동이나 여당과 비서실간의 갈등도 피할 수 있다.

여당이 대통령만 쳐다보는 상황에서는 불가피하게 여당 무력 (無力)→야당 무력→국회 무력이 되고 정치기능의 위축.부재 (不在)가 오게 마련이다.

무력한 여당이 느끼는 소외감.변방 (邊方) 의식이 대통령이 출국만 하면 갈등으로 나타나고,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에 몰린 야당이 강경투쟁으로 나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민심을 대변.반영하고, 거꾸로 민심을 설득하는 것이 주요 정치기능이라고 할 때 정치기능의 위축은 곧 민심통로의 두절을 의미한다.

민심이 제대로 피드백되지 않는 상황의 각종 결정이 민심저항을 부르는 것도 불가피하다.

이제 와서 여권 내부에서 대통령의 과중한 부담을 덜고 당.정 (政).비서실의 역할분담을 확실히 하자는 논의가 나오는 것은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다.

당은 정치, 내각은 행정, 비서실은 보좌와 조정이라는 각자 있어야 할 제자리를 확실히 찾아가는 것이 국정 정상화의 지름길이다.

일부에선 이를 내각제 또는 이원정부적 운영이라고 하고, 또 혹시는 대통령권한의 약화를 염려하지만 개헌이 되기 전에는 강력한 대통령권한은 그대로다.

전혀 염려할 일이 아니다.

오직 실천할 수 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송진혁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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