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세계 도시' 신경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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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홍콩과 싱가포르는 아시아 지역의 무역.금융.물류.서비스 분야 허브(중심)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아시아의 '세계 도시'를 자처하는 두 도시 간에 최근 신경전이 한창이다. 싱가포르의 국부(國父)인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의 발언이 발단이다.

그는 지난 주말 "홍콩이 중국경제에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궁지에 빠질 것"이라고 꼬집었다. 홍콩경제가 중국 관광객 특수(特需)와 홍콩.중국 간 무관세 협정(CEPA) 등에 힘입어 호황을 구가하는 걸 겨냥한 것이다. 이어 "싱가포르는 400만명을 위해 항해도를 그린다. 하지만 홍콩은 다르다. 700만명(홍콩)뿐만 아니라 13억명(중국)을 생각하는 중국정부에 의해 미래가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싱가포르가 독립국가로서 경제를 운용하고 외국 기업을 유치할 환경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데 비해 중국의 특별행정구에 불과한 홍콩은 제약이 많다는 뉘앙스다.

홍콩 사회는 즉각 발끈했다. 중국에 비판적인 민주당의 양썬(楊森)주석조차 "인구대국이라 해서 소국(小國)보다 효율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라고 충고했다. 홍콩은 요즘 다국적 기업의 지역본부를 상하이(上海).싱가포르에 빼앗기는 추세를 못마땅해 하고 있다. 이에 반발하듯 홍콩의 학계 인사들은 "홍콩은 중국의 정치.경제 개혁의 실험장으로 앞으로 더욱 각광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리콴유는 그러나 홍콩의 '오너'인 중국에 대해선 몸을 낮췄다. "중국의 최고지도자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이 '50년간 홍콩의 체제는 불변'이라고 약속했는데 홍콩은 거대한 잠재력을 가진 중국 경제에 힘입어 번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 12일 총리에 취임한 장남 리셴룽(李顯龍)도 '중국 달래기'에 입을 맞췄다. 지난달 자신이 대만을 방문한 데 대해 중국 측이 격분했던 걸 의식한 행보다. 리 총리는 22일 "대만해협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날 경우 싱가포르는 베이징(北京)을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와 홍콩의 경쟁도 결국은 중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이다.

이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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