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밀레니엄작가] 10. 佛 카롤린 봉그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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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세계적 거장에게 기대하는 것은 삶에 대한 묵직한 통찰력이지만, 프랑스작가 카롤린 봉그랑 (31) 은 그와 반대로 '가볍고 날렵한 글쓰기' 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출세작은 국내에도 번역소개된 93년작 '밑줄긋는 남자' (열린책들) . 주인공은 뾰족한 직장도, 애인도 없이 도서관에서 책 빌려보는 일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이십대 여성 콩스탕스다.

어느날 그녀는 대출한 책에서 마치 자신을 겨냥한 듯한 구절에 밑줄이 그어져있는 것을 발견한다.

책말미에는 아예 '당신을 위해 더 좋은 책이 있다' 는 권고까지 적혀있다.

술래잡기라도 하듯, 콩스탕스는 밑줄의 주인공이 권하는 책을 찾아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하는 듯한 그의 밑줄을 읽는 재미에 빠져든다.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유혹자에 대해 조급증을 느낀 콩스탕스는 자신의 심경을 전하기 위해 직접 밑줄을 긋는 데까지 나선다.

두 남녀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기존 문학작품의 구절들을 절묘하게 인용

하는 작가의 재능은 느리고 서정적인 뮤직비디오를 편집하는 기술과도 비슷하다.

미래가 불확실한 젊은이들의 일상적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한 재능뿐이었다면, 자칫 통속물로 그치기 쉬운 사랑이야기가 뼈대이지만 카롤린 봉그랑은 이처럼 독자로서의 자의식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소설적 장치로 자기만의 문학을 새로 생산해낸다.

카롤린 봉그랑이 작가로 데뷔한 것은 뉴욕에서 생활한 경험을 옮긴 91년작 '맨해튼 혼돈' 을 펴내면서. 하지만 그의 발랄한 글쓰기 이력은 이미 18세때 잡지기사를 기고하면서 시작됐다.

국내에 번역 소개된 또다른 작품인 94년작 '아이들의 입에서' (열린책들) 는 집을 나간 아버지를 찾기 위해 신문에 어머니가 죽었다고 거짓 부고 (訃告) 를 낸 11세 소녀가 화자. 해체위기의 현대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어린아이의 시점에서 경쾌하게 그려낸 작가는 가장 최신작인 96년작 '막시멈' 에서는 애정결핍증에 걸린 개를 화자로 삼기도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카롤린 봉그랑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작가이지만 그의 발랄한 문체가 장르를 넘나들며 발휘할 잠재력은 충분히 기대할 만하다.

프랑스2TV와 미국CBS에서 방송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현재 프랑스 - 미국 문화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 남가주대학에서 영화시나리오 작가로의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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