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표정] 北 흔들기에 南 속수무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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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남북한 차관급 회담이 무산된 21일 중국 베이징의 켐핀스키 호텔 현장은 무거운 분위기였다.

◇ '북한 양동작전' =회담이 결렬된 시간 (오후 3시.현지시간) 이곳의 북한대사관측은 내외신 기자들을 급히 불렀다.

지난 15일 서해 교전사태에 대한 입장을 설명하고 우리 정부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기 위해서였다.

북한측의 회담연기 발표에 당혹해있던 우리 회담관계자는 "북한 특유의 심리전과 양동작전이 시작됐다" 며 걱정했다.

북측은 이날 오전 10시로 잡혔던 회담을 2시간 전에 전화를 통해 오후 3시로 '연기하자' 고 요청했다.

그리고 비료지원 차질을 이유로 오후 회담일정을 40분 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이 관계자는 "북한의 이런 움직임은 상투적 압박전술" 이라며 "무엇인가 있는 듯 감추고, 바꿔버려 상대 대표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려는 것" 이라고 분석했다.

평양에서 고려항공편으로 2시간이면 올 대표단을 굳이 24시간 넘게 걸리는 평양~베이징 국제열차편으로 회담 전날 도착하게 만든 것도 마찬가지다.

회담 예정일 하루 전까지는 당연히 통보해야할 대표단 명단마저 보내오지 않았다.

대표단간의 사전접촉을 하지 않고 북한대사관측이 우리 대사관의 주재관에게 전화연락을 취하는 방법만 썼다.

반면 이같은 북한측의 행동은 차관급 회담에 대한 부담감을 드러낸 것이란 분석도 있다.

비료를 먼저 지원받고 있는 북측으로선 이산가족 문제 등이 버거워 회담장 밖에서 '외곽 때리기' 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

◇ 현장상황 = 회담장인 항저우 (杭州) 룸에서 대기하던 내외신기자들은 회담시간 10분 전에야 북측의 회담연기 통보사실을 확인했다.

우리측 대표인 조명균 (趙明均) 통일부 교류협력심의관은 굳은 표정으로 "북측이 오후 2시15분쯤 전화로 오후 3시 회담을 연기하자고 통보해 왔다" 고 공개했다.

북한 중앙통신 기자도 연기 사실을 몰랐는지 황급히 회담장을 떠났다.

그런 속에서 우리 대표단이 북한측에 지나치게 끌려다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회담장 주변에서 나오고 있다.

북한이 일방적으로 연기 통보를 해도 우리측은 특별한 비난이나 반박 없이 수용했기 때문. 더구나 북한 대표단장인 박영수 (朴英洙) 조평통 부국장이 차관급 회담의 대표로서 격 (格) 이 맞느냐는 논란도 있지만 우리 대표단은 이를 덮고 있다.

신임장만 있으면 북한대표로 인정할 수 있다며 "북쪽 나름대로의 스타일이 있다" 고 감싸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한 회담관계자는 "북한측이 이렇게 철저히 우리측을 쥐고 흔들기는 처음" 이라며 "우리가 햇볕쪽으로만 간다는 지적을 받을 것 같다" 고 말했다.

베이징 =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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