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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아니면 '아니오' 해야지 (1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16) 군사영어학교 입학

해방 이듬해인 1946년4월, 당시 서울에는 나 같은 이북출신 젊은이가 취업을 위해 응시할만한 곳은 오직 세 곳 뿐이었다.

농회 (農會.농림부 전신) 와 한국은행 조사부, 군사영어학교 (약칭 '軍英' )가 그것이었다.

이 가운데 나는 군대에 들어가는 것이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판단, 군영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마침 건국대학 선배인 최재방 (崔在昉) 씨가 소개장을 써 주길래 그걸 들고 중앙청 103호실에 있는 국방부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랬더니 이응준 (李應俊.초대육군참모총장, 1891~1985) 장군이 나를 보고는 "좀 늦었네" 하는 것이었다.

알고본 즉 5월부터 육군사관학교가 정식으로 문을 열게 돼서 군영은 더 이상 모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북에서 공산당과 싸우기 위해 월남한 청년인데 기회를 안 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떼를 썼다.

이때 한 미군 장교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이 장군이 "저 사람이 바로 교장으로 있는 리스 (Reese) 소령이니 직접 얘기해 보라" 고 했다.

더듬거리는 영어로 내 소개를 하자 리스 소령은 내 영어를 도무지 못 알아 듣겠다는 표정으로 '내일 군영에 가서 일단 시험을 보라' 는 것이었다.

옆에 있던 이 장군은 "소개장에는 영어를 잘 한다고 했던데 왜 말이 잘 안 통하나" 라며 빙긋이 웃었다.

그래서 나는 "2주일만 시간을 주십시오" 라고 큰 소리 (?) 를 쳤다.

육군사관학교의 모태가 된 군사영어학교는 한국군 창설을 위해 미군정청이 급조한 장교 육성기관이었다.

창군 (創軍) 과정에서 미국이 가장 애로를 느낀 것은 바로 영어였다.

그래서 미군정청은 1945년 12월 서울시내에 군사영어학교 (Military Language School) 를 설치하고 일제때 군경험자 중 영어가 통하는 사람들을 선발했다.

그렇다 보니 일본군 출신, 만주 군관학교 출신, 나같은 학병출신과 일본군지원병 출신들이 참여하게 된 것이다.

45년 12월부터 약 5개월 동안 총 1백10여명의 장교를 배출해 냈던 군영은 짜임새 있는 일관된 편제로 운영된 게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신입생이 들락거리는 바람에 서로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영어실력에 따라 4개 반으로 나눠 하루 2시간씩 2주간 영어교육을 받았다.

영어수준도 매우 기초적인 군사영어였지만 그나마 전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음식은 매끼 한식 백반을 차려 줘 그때까지 비지로 굶주린 배를 채우던 나로서는 가히 신선놀음과 다를 바 없었다.

학생들은 통역관 신분으로 출퇴근을 했으며 월 9백원 정도의 봉급을 받기도 했다.

대표적인 군영출신으로는 이형근 (李亨根). 채병덕 (蔡秉德) . 정일권 (丁一權). 최경록 (崔慶祿). 유재흥 (劉載興). 민기식 (閔機植) 장군 등을 들 수 있는데 그후 이들은 국방장관, 합참의장, 육참총장 등 군의 수뇌부를 형성해 왔었다.

내가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한 것은 그해 5월1일로 군번은 10101번이었다.

내가 입교는 늦었지만 남보다 먼저 임관하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내가 입교할 당시에는 이미 5월1일부 임관 예정자들이 내정돼 있었는데 갑자기 이응준 장군이 '영어 잘하는 사람을 하나 임관시켜 보내라' 고 해 내가 선발됐다는 것이었다.

군영은 내가 임관하자마자 곧 문을 닫았고 그뒤를 이어 경비대 사관학교 (陸士의 전신)가 창설됐다.

임관후 내 첫 보직은 국방부 감찰총감 (이응준) 의 보좌관이었다.

소위 계급장을 달고 신고를 하자 이 장군은 "자네가 왔나?" 하면서 나를 기억해 주었다.

군영에 처음 입교할 때 내가 이 장군에게 '2주일만 주시면 영어를 자신있게 하겠다' 고 장담은 했었지만 내심으론 몹시 불안했다.

당시 국방부내 책임 참모직에 있던 사람은 이장군과 본부사령 김웅수 (金雄洙) , 경리담당 김일환, 법무담당 이지형장군 등 뿐이었다.

글= 강영훈 전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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