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레터] 기록 앞에 겸허한 그 정신 정말 존경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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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단의 거두 유종호(69) 연세대교수가 1940년부터 49년까지 자신, 아니 우리 모두의 힘겨운 삶을 되돌아본 회고록 『나의 해방 전후』(민음사)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유 교수 입장에서는 이 책과 함께 낸 첫 시집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에 더 강한 애착을 느낄지 모르나 시대 상황이 그런 지라 회고록이 특별히 조명을 받았습니다.

유 교수의 회고록에 많은 사람이 놀라는 부분은 시시콜콜한 것까지 담아내는 지성인으로서의 그 꼼꼼함입니다. 어느 페이지를 들춰도 그 시절 풍경이 그대로 손에 잡힐 듯합니다. “자신의 주의·주장에 앞서 사실적인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유 교수의 말씀에 정말 공감합니다. 민음사의 박상준 주간은 역사에 대한 유 교수의 치열함을 말해주는 일화를 하나 들려줬습니다. “유교수께서 어느 자리에서 하신 말씀인데, 김지하씨가 도망다니다가 유 교수 댁을 찾아왔는데, 그때 누구 누구와 이런 저런 음식을 해먹었는데 김지하씨는 기억할 지 모르겠다더군요.”

문자의 시대가 ‘거(去)’하고 영상의 시대가 왔다고 문자의 힘이 떨어집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 정치권의 핫 이슈인 ‘신기남’을 인터넷으로 한번 검색해 보십시오. 온갖 기록이 떠돕니다. 그럴수록 더 정직해야겠지요.

93년에 출간된 김성칠 교수의 『역사 앞에서』가 떠오릅니다. 한국 전쟁 당시 그가 쓴 일기에는 역사학자로서의 고민이 진솔하게 드러납니다. 1950년 1월 1일자, 그의 맹세입니다. ‘쓰기보다 읽기에, 읽기보다 생각하기에’,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사소한 일이라도 먼 앞날을 헤아리고 인생의 깊은 뜻을 생각해서 말하고 행동하자’고 적혀 있습니다. 세상을 사는 이치에 이것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정명진 기자 Book Review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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