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병욱칼럼] '오만'이란 불치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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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치에서 오만은 비상 (砒霜) 과 같다.

집권층의 오만은 수많은 사람을 해치고 결국은 스스로를 망친다.

1978년 12월의 10대 국회의원총선거는 유신체제 1기 6년에 대한 심판의 의미를 지닌 선거였다.

여당은 의석에선 야당에 비해 7석이 많았으나 전국득표율에선 1.1%를 뒤졌다.

차기 대통령은 5개월 전에 이미 국민의사와는 관계없이 결정나 있었고, 국회의석의 3분의 1은 대통령이 임명하다시피 하기 때문에 안정의석은 원천적으로 걱정없는 체제였다.

문제는 총선거가 국민의사가 직접 표출되는 유일한 통로였다는 점이다.

총선결과로 인해 제도적으로 유신체제가 작동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당시 국민은 정치적으로 집권측에 패배를 안겨준 것이다.

그런데도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민심의 소재를 도외시했다.

그는 선거직후 "유정회의 3분의 1 의석이 있으니 국회 안정세력 확보에는 문제가 없고, 그만하면 표도 예상대로 나왔다.

공화당에선 걱정인 모양인데 그 정도면 잘 됐다고 본다" 는 공식적인 의사표명을 했다.

그런 상황인식의 표명은 국민의 심판을 무시한 오만으로 비쳤고, 개혁.쇄신을 통한 효과적인 후속조치를 제약했다.

결국 1.1% 패배는 유신체제가 몰락으로 반전하는 분수령이 됐다.

5공 말기 개헌논의가 한창이던 1987년 4월 전두환 (全斗煥) 대통령은 느닷없이 개헌유보를 선언했다.

평통의 거수기 투표로 또 다시 차기대통령을 뽑겠다는 것이다.

국민의 열망을 거스른 집권측의 이 오만은 6.10항쟁을 불러 왔고, 결국 6.29선언으로 '대국민 항복' 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렸다.

그나마 민심을 제대로 읽고 국민에게 항복한 덕에 야권의 분열과 겹쳐 정권은 유지할 수 있었다.

대통령이 "돈 안 받는다" 는 것을 입버릇처럼 내걸고 도덕성을 독점하려 했던 문민정부에서는 바로 턱밑에서 대통령 아들의 국정 농단과 비리가 자라났다.

아들문제를 언론이 다루지 못하게 그렇게도 압력을 넣더니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게 키운 셈이다.

이 모두 집권자의 오만이 부른 실패 사례다.

그런데 걱정스럽게도 김대중 (金大中) 정부에서도 김태정 (金泰政) 검찰총장의 법무장관 기용과 고급 옷 파동 처리과정에서 바로 그 오만의 조짐이 두드러지게 표출됐다.

金씨는 상명하복 (上命下服) 의 검찰조직에서 부하검사들의 공개적 불신을 당했을 때 진작 물러났어야 옳았다.

그런 사람을 총장임기보장이란 명분으로 무리하게 유임시켰다가 임기를 두달 이상 남겨둔 채 검찰 인사를 장악하는 법무장관으로 승진시킨 것은 이중으로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더구나 국민과 일반공직자들을 허탈에 빠지게 한 고급 옷 파동의 중심에 그 부인이 있어 검찰 수사가 희화 (戱畵) 화되고 불신을 받게 됐으면 적어도 정치.도의적 책임을 지거나 묻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도 金대통령은 언론보도를 '마녀사냥식' 이라고 몰아세우고 국민정서와는 동떨어진 여론조사 결과를 내세워 그를 유임시켰다.

그 직후에 시행된 두 지역의 보궐선거는 야당후보들의 압승을 통해 국민들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줬다.

金장관의 기용과 옷 사건 불문, 유임에 대한 항의와 반대다.

국민의 심판이 내려졌는데도 계속 무시했으니 어찌 오만이 아니겠는가.

불행중 다행 (?) 으로 金장관은 조폐공사파업 유도 파문의 유탄을 맞아 결국 낙마 (落馬) 하고 말았지만 이 '오만한 집권자' 의 이미지는 현정부의 상처로 남을 것이다.

집권측의 오만이 물론 기본문제지만 야당의 오만도 일을 그르치긴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선거는 돌고 도는 양상을 지녀 왔다.

90년 3당 통합으로 개헌선을 확보했던 여당은 92년 4월 13대 총선거에서 과반수 의석에 미달해 인위적으로 과반수를 급조해야 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대선에서는 낙승했다.

95년 지방선거에서는 다시 여당 참패로 돌아섰다가 96년 14대 총선에선 여당이 이겼다.

그렇지만 97년 대선에선 야당이 승리했다.

중간 중간에 실시되는 재.보선 결과도 다음 선거에서 비슷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게 보통이다.

승자가 선거결과에 자만해 무리수를 두면 국민들의 견제심리가 발동하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여야 모두 선거민의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내일을 기약하는 게 현명하다.

집권측은 국민의 심판을 무시해 오만하다는 소리를 듣는 일이 더 이상 없어야 하고, 야당은 단기적 승리에 도취해 정국을 대결 일변도로 몰아가선 안된다.

성병욱 본사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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