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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빌려드립니다” 소액대출 도우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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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4일 은행 지점장 출신인 김광열(61·가운데)씨와 정유회사 공장장으로 있다 퇴직한 김용대(63·왼쪽)씨가 소액대출을 신청한 윤동호(45)씨의 목공소를 찾아가 윤씨에게 자금 상황 등을 묻고 있다. 이날 이들은 윤씨에게 자신들의 경영 노하우도 전수해 줬다. [김성룡 기자]

“대출 신청하셨죠.” 14일 오전 10시, 서울 홍은동 목공거리. 정장을 차려 입은 노신사가 윤동호(45)씨가 운영하는 작은 목공점에 들어섰다. ‘마이크로 크레디트(소액대출)’ 실사를 전문으로 하는 사회적 기업 ‘희망도레미’의 김광열(60)씨였다.

윤씨는 지난달 서민 무담보 소액대출기관인 ‘사회연대은행’에 “1000만원을 대출해 달라”고 신청했다. 7월 목공소를 차렸지만, 자금이 모자라 설비를 제대로 마련하기 어렵다고 했다.

“내집 한 칸 없으니 은행 빚도 얻을 수 없더군요….” 윤씨는 고개를 떨궜다. 김씨는 2시간 동안 어떻게 제품을 디자인하는지, 예전에 다니던 목공소에 단골은 몇 명이었는지 등을 꼼꼼히 물었다.

“디자인학과 교수들의 작품을 주문 제작하는 게 독특한데, 교수 리스트를 정리해서 정기적으로 e-메일을 보내세요. 그냥 걸려오는 전화만 받으면 안 돼요.” 윤씨의 대답 중간중간 김씨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뭐 어려운 건 없느냐”고 묻기도 했다.

김씨는 1990년대 중반 대형 은행에서 지점장을 지냈다. 외환위기 때 구조조정당한 뒤 중소기업에 재취업해 올해 퇴직했다. 올 5월 서울 평창동에 문을 연 ‘희망도레미’는 직원 13명 모두 은퇴자다. 기업 최고경영자(CEO)부터 은행 부행장, 정유회사 공장장 등 경력이 화려하다. 한 시민단체의 은퇴자 교육을 받으며 만났다. “경제계에서 쌓은 지식을 보람되게 쓰자는 데 의견이 맞았죠.” 한석규(61) 대표가 말했다.

희망도레미를 만든 이들은 지난 6월 사회연대은행으로부터 소액대출 신청자 현장 실사 용역을 첫 사업으로 따냈다. 한 번 실사에 받는 돈은 4만원. 2만원은 교통비와 밥값에 쓰고, 2만원은 회사에 적립한다.

이들의 업무는 대출 신청자가 사업을 잘 꾸려 대출금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다. 신청자는 대부분 기초수급대상자나 차상위계층. 실사 현장에서 이들은 미국발 경제위기의 그늘을 만났다. 박용기(60) 전 동아제약 이사는 “멀쩡한 동네 음식점이 경기 침체로 한두 달 만 수입이 줄어도 가게 문을 닫을 판”이라고 했다. 한결같이 형편이 딱한데, 상환 가능성을 따져 부적격 판정을 낼 때는 가슴이 쓰리다.

그래서 이들은 대출 심사만 하지 않는다. 예전 직장 경험을 되살려 무료 컨설팅을 곁들인다. 임대료가 싸다며 모텔 골목에 추어탕 가게를 내려던 여사장에겐 목 좋은 곳을 물색해줬고, 간이 신문판매대를 하려던 남자에겐 동거 중이던 여자 친구와 혼인신고를 하라고 조언해줬다. 김영길(61) 전 조흥은행 지점장은 “인생 선배 입장에서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야 사업도 잘된다는’ 둥 인생 설계를 해주기도 한다”며 웃었다.

희망도레미의 꿈은 실사비를 차곡차곡 모아 취약계층을 돕는 데 쓰는 것이다. 류익상(60) 전 농협중앙회 지점장은 “우리도 언젠가 창업자금을 직접 대출해줄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선언 기자 , 사진=김성룡 기자

◆마이크로 크레디트(Micro Credit)=담보가 없는 서민들에게 상환 가능성을 따져 창업자금을 대출해주는 사업. 정부는 12월 2조원대 서민 소액대출 사업인 ‘미소(美少)금융사업’을 시작한다고 18일 발표했다. 현재 마이크로 크레티트 사업을 가장 크게 하는 기관은 사회연대은행으로, 7년간 960여 명에게 250억원가량을 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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