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블레어의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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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영국에 처음 갔을 때의 일이다.

벨기에의 축구장에서 영국 훌리건들이 난동을 부린 뉴스가 텔레비전에 나왔다.

함께 보고 있던 영국인 친구가 나를 돌아보며 "아, 저 야만스런 영국놈들!" 하고는 겸연쩍게 웃는다.

우리는 영국을 '신사의 나라' 로 안다.

그러나 이것은 영국의 한 측면일 뿐이다.

다른 한 측면에는 야수와 같은 공격성이 있다.

'백수 (百獸) 의 왕' 으로서 품위를 가진 야수 사자를 국가의 상징으로 삼는 것은 이들 두 측면을 아우른 것이다.

화가 나더라도 정중한 태도와 점잖은 말 속에 예리한 가시를 담는 것이 사자의 위엄을 좇으려는 영국 신사의 자세다.

19세기에 대영제국이 백수의 왕처럼 세계에 군림한 데는 산업혁명의 성공과 함께 이 절제된 공격성이 뒷받침이 됐다.

2차세계대전 후 영국은 세계무대에서 공격성을 드러낼 기회를 잃어버렸지만 수에즈 침공 (1956).포클랜드 전쟁 (1982) 등 분쟁이 있을 때마다 영국 국민은 정부의 공격적 정책에 절대적 지지를 보여줬다.

코소보 사태가 공중전 (Air War)에 글자 둘을 더 붙여 블레어 전쟁 (Blair War) 이 돼 간다는 우스갯소리가 돈다.

실질적 주역 미국을 제쳐놓고 영국의 블레어 정부가 나토 진영에서 가장 호전적인 전략을 제창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유럽국에서는 공습의 계속이 국민의 비판에 직면해 있다.

예상 밖으로 저조한 공습효과, 밀로셰비치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고 현지상황을 악화시킨 역효과, 그리고 거듭된 오폭 때문이다.

그러나 지상군 투입을 주장하는 블레어는 영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모으고 있다.

블레어가 강경론을 처음 내놓았을 때 주변에서는 정치적 모험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분석으로 블레어의 입장은 '일석삼조 (一石三鳥)' 다.

나토 개입의 성과가 신통치 않게 끝나더라도 강경책을 주장한 블레어는 책임을 면할 수 있다.

그리고 사태의 주역인 미국은 영국이 앞장서 강경책을 내놓는 것을 고마워하고 있다.

게다가 선명노선의 주장을 통해 영국민에게 도덕적 만족감을 만들어주고 있다.

영국에서 '유럽' 이라 하면 '대륙' 이란 말과 똑같이 영국 자체를 뺀 유럽을 가리킬 때가 많다.

영국은 유럽 안에 있으면서 또한 밖에 있는 나라인 것이다.

인권이 주권을 우선하느냐 하는 인류의 당면과제에 대해 영국이 인권 우선의 입장을 쉽게 취하는 것을 이 차이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11세기의 노르만 정복 이래 대규모 본토침략을 겪어보지 않은 역사적 특성 때문에 영국인은 주권문제에 대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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