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과거사 확전 태세…특위 원칙적 합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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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 신기남 전 의장은 19일 오전 "나의 아픈 가족사를 딛고 역사적 과업을 이뤄달라"고 말했다. 부친의 친일 행적과 관련해 사퇴하면서 연 기자회견에서다. 그는 "역사의 진실 위에서 민족이 화해하는 위업에 내가 기여하고 그 영광을 독립투사 여러분께 바치겠다"고 비장하게 말했다. 친일 진상규명의 '희생양'이 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신 전 의장의 사퇴를 계기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주도권을 잡고 정국을 운영한다는 계획이다.

비슷한 시각 한나라당사에선 박근혜 대표가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당에서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연관시켜 부담을 갖지 말라"며 정면승부 의지를 보였다. 상임운영위를 주재한 자리에서다. '친일'과 '유신'을 주요 타깃으로 한 열린우리당의 공세에 무시전략으로 일관하던 한나라당도 박 대표의 입장 표명 이후 '좌익활동'을 공격 대상으로 삼아 전선을 확대하고 나섰다.

지난 18일 "포괄적으로 과거사를 조사한다면 친북.용공활동도 조사대상에 포함해야 한다"고 밝혔던(본지 8월 19일자 3면) 박 대표는 이날 자신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박 대표는 "과거사 때문에 현재와 미래가 어렵다는 대통령과 여당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그러나 이런 얘기가 나온 마당에 대폭적으로 과거사를 짚어 보자고 제의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 대표의 제안대로라면 여권 핵심인사들도 조사 대상이 될 수 있다. 박 대표는 "이를 위해 국회는 지원의 틀만 갖추고 중립적인 과거사 조사위를 구성해 조사위원에 중립적이고 검증된 학자 등 객관적 인사를 참여시키자"고 강조했다. 그는 친일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 피해 ▶냉전시대 친북활동 ▶5.16 이후 산업화 과정의 공과(功過)도 따질 것을 제안했다.

김덕룡 원내대표는 "국회 과거사 특위 제안은 수용할 수 없고 국가적 차원에서는 논의할 수 있다"며 "정치적으로 나가면 중국 문화혁명과 같다. 지금 홍위병이 움직이고 있고 1차적 피해는 열린우리당 신기남 전 의장이 받고 있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은 이날 친일진상규명에 대한 의지를 더욱 다졌다. 천정배 원내대표는 "신 전 의장의 사퇴에도 불구하고 친일 진상규명과 미래로의 발전 의지는 변함없다"고 못박았고, 이부영 신임 의장도 "신 전 의장의 결단을 받들어 결의를 다지자"고 말했다.

박근혜 대표의 "과거사를 포괄적으로 규명하자"는 발언에 대해서는 일단 환영한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박 대표가 친북.용공 부분을 포함해야 한다고 한 데 대해서는 "공안세력이 굉장히 강했던 시절을 겪었는데 과연 처벌되지 않은 친북.용공 세력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우원식)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서로 다른 목표를 겨냥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날 양당 원내수석부대표회담에서 일단 과거사의 포괄적인 조사가 필요하다는 원칙에는 합의했다. 그러나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기구와, 자문기구의 제안을 받아 입법활동을 진행하는 국회 내 과거사특위를 동시에 구성하자"는 열린우리당 측 주장과 "국회는 특위의 원칙과 구성에 대한 가이드라인과 과거사위원회 구성의 법적 근거만 제공하고 나머지는 독립기구에서 하는 게 좋다"는 한나라당 입장이 서로 달라 구체적인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가영.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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