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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창작오페라의 나아갈길-이어령교수 특별기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지난달 초연된 이영조의 창작오페라 '황진이' 를 감상한 이어령 교수가 한국 창작오페라와 뮤지컬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글을 보내왔다.

오페라 '황진이' 는 오는 6월24~27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앙코르 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또 서울오페라앙상블이 백병동의 창작오페라 '사랑의 빛' 을, 강화자베세토오페라단이 이동훈의 '백범 김구' 를 5월중 각각 초연할 예정이어서 창작오페라 열기는 갈수록 뜨거워질 전망이다.

*** 우리 토양에 뿌리내려야 산다

한국말의 '소리' 는 그 의미영역이 아주 넓다.

말소리.노래소리.바람소리처럼 언어.음악.자연의 모든 소리를 한데 어우르는 말이다.

그래서 판소리 하면 말과 음악이 아무런 틈새 없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느껴진다.

문학성과 음악성이 가장 높다는 서양 오페라는 한국에 들어오면 이상스럽게도 말과 음악이 따로 논다.

한국의 창작 오페라가 때로는 닭살마저 돋게 하는 심한 거부감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의 음악 연주자들이 세계적 수준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한국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는 동양계 학생들이 줄리아드 음악학교를 비롯하여 각종 콩쿠르에서 서구의 젊은이들을 양과 질 면에서 다같이 압도하고 있다.

그러나 창작 오페라나 뮤지컬의 수준은 어떤가.

음악이 언어성과 접하면 갑자기 하늘옷을 잃어버린 선녀처럼 되고 만다.

좀 비약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곧 음악양식과 문화양식의 괴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순수한 음의 세계에는 문화나 생활양식이 직접 침투하기 힘들지만 참조성 (參照性) 이 강한 언어와 결합되면 음의 보호막이 찢기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오페라나 뮤지컬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음악양식을 그대로 모방할 것이 아니라 한국문화의 토착성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자기 것으로 발효되고 육화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상품이라는 말과 함께 최근 해외 문화시장을 겨냥한 오페라와 뮤지컬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대본과 작품 구성 자체에 많은 문제점이 있었지만 오페라 '이순신' 의 경우에 그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이탈리아 작곡가가 5음 음계등 한국적 음악전통을 최대한 살리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 가 세계로 향한 길을 열게 된 것도 이문열의 문학성과 한국의 문화적 특성을 음악 속에 잘 육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서양 음악양식을 수입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의 문화를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창조해 낼 때 오히려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역설을 얻게 된다.

이영조 작곡의 오페라 '황진이' 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국사람이 한국말로 부르는 한국 이야기인데도 거의 판소리를 듣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다.

사물이나 가야금 같은 한국의 전통 악기를 배치해 한국 색을 짙게 깔면서도 관현악 편곡에 조금도 이질감이나 어색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아리아 '청산리 벽계수야' 에서 보여주듯 세계무대에서 오랫동안 활약해온 김영미의 세련미가 아무런 이질감 없이 한국 색으로 토착화돼 있다.

오페라나 뮤지컬의 한국화라는 말은 곧 모방이 아니라 독창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음악과 말의 일체라는 것은 곧 음악양식과 문화양식의 일체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페라와 뮤지컬은 서양음악이 아니라 바로 판소리를 키운 한국의 토양에 뿌리를 내릴 때 외국인의 귀에도 감동을 주는 새로움으로 와 닿을 것이다.

귤이 회수를 넘어오면 탱자가 된다는 격언은 결코 글로벌 시대에도 통하는 진리가 이미 아니다.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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