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인터넷 언어폭력 더 좌시할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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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인터넷의 고질적 병폐는 최근 더 심해지고 있다. 누리꾼들의 언어폭력에 충격 받은 최진실씨가 자살하고, 한국을 비하했다는 일방적인 비난에 2PM의 재범이 그룹을 탈퇴해야 했다. 최근에는 포르노를 불법으로 다운받은 한국 누리꾼 수만 명이 미국 포르노 업자들에게 고소당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제 상황은 너무 포괄적이고 광범위해져서 더 이상 누리꾼들의 개인적 도덕만 문제 삼을 수 없을 단계가 되었다. 다수가 그런 환경에서 그런 태도를 보인다면 그것은 인간 본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본성이 작동하지 않도록 환경이 개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1970, 80년대의 공중 화장실은 낙서 천지였다. 주로 성적인 비유나 욕설로 도배가 돼 있었고, 가끔은 정부 비판이나 깊은 철학적 사유가 나타나기도 했다. 인기 있는 낙서에는 수십 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 화장실에 낙서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인터넷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하필 공중 화장실에서 낙서를 했던 것일까? 그 이유로 첫째, 익명성의 보장을 들 수 있다. 누가 낙서를 했는지 누가 그것을 보았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음 놓고 금지된 장난을 할 수 있었다. 둘째, 육체적 배설과 정신적 배설이 상통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발신자의 상황은 화장실과 같다. 폐쇄적이며 혼자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경계가 모호해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폭력·성(性)과 같은 금기시되는 것에 대한 발언을 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 발신의 메시지가 화장실과 달리 대한민국의 모든 공중이 볼 수 있는 사이버 공간에 게시된다는 점이다. 이는 안에서는 문이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밖에서는 안에 있는 사람이 훤히 보이는 특수 장치를 한 화장실 속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실제 상황이라면 사람들은 이런 장치를 한 설계자에게 거세게 항의할 것이다.

이제 알려줄 때가 왔다. 당신이 인터넷에 앉아 있을 때 당신을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느슨한 옷차림을 하고 험한 욕도 한다. 항상 긴장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배설의 순간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때문에 이상한 화장실을 만들어 놓고 용변을 보는 사람을 비난한다면 그건 난센스다.

인터넷 화면 오른쪽 아래에 조그맣지만 또렷하게 ‘지금 ○○○○명의 접속자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정도의 문구를 넣으면 어떨까? 또 그 문구를 클릭하면 접속자의 연령별 분포도와 지역, 학력 같은 더 자세한 정보가 나오게 하는 것도 좋다.

우리는 누구나 상대방을 고려하면서 대화를 한다. 상대방이 노인인데 반말을 하거나 노인들의 추태를 함부로 들추지 않는다. 즉 이런 컨텍스트가 고려돼야 올바른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것인데 인터넷에서는 자신의 대화 상대가 누군지 몰라 수위 조절이 불가능하다.

이는 CCTV 설치 구역에 설치를 알리는 경고판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감시카메라는 어두운 골목길에서의 범죄를 사전에 막는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지 은밀한 장소인 줄 알고 진한 포옹을 하는 불쌍한 연인들을 만천하에 노출시키는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 아니다.

인터넷에서의 언어폭력, 여론몰이식 마녀사냥은 이제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몇몇 누리꾼만 잡는 전시행정이나 공소한 도덕적 비난, 어쩌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느냐는 한탄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누리꾼들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그곳이 결코 언어폭력과 성의 온상이 될 만큼 은밀한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터넷에 접속할 때마다 알 수 있게 하는 경고판이 시급한 실정이다.

최혜실 경희대 교수·국어국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