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의 희망찾기] 1.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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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감옥에서부터 아프던 이 때문에 치과엘 갔습니다.

전동균 원장이 치아 X - 레이 사진 앞에서 젖은 음성으로 말하더군요. "어금니가 다 내려앉고 모두 금이 가버렸어요. 이는 속일 수 없는 법인데, 말 그대로 이를 악물고 살아내셨군요. " 문득 우리가 살아낸 지난 시대의 아우성이 등뒤에서 폭포소리로 들려왔습니다.

수출 전선에서 철야로 밀어내던 전쟁 같은 노동의 새벽들, 하루하루 피 말라가던 기나긴 수배 생활, 안기부 지하밀실의 짐승 같은 비명의 시간들, 사형.무기징역, 그리고 사회주의 붕괴와 세계사의 격변을 한 몸에 품고 절망하고 무너지던 순간들, 새벽부터 밤중까지 처절하게 정진하던 차디찬 독방의 세월들.

그렇게, 저마다 자기 몫의 짐을 지고 이를 악물고 살아나온 우리들의 지난 날, 아물지 않은 우리들의 상처와 포기할 수 없는 우리들의 희망…. 눈가를 훔치며 혼잣말처럼 두런댔지요.

"이젠 악물고 나갈 이도 없는데 난 무엇으로 살아가지?" "고르게 잘 나누어 씹어야지요. 잘 나누어야 갈라지지 않고 오래 가지요. " "으음, 정말 그러네. 사명감도 함께 나누고 좋은 일도 힘든 일도 함께 나누고. 나눔만이 나뉨을 막을 수 있는 거겠지. "

우리에겐 꿈이 있었지요. 지상의 모든 이들이 보람찬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와 가족과 오순도순 한 밥상에 둘러앉는 '평온한 저녁' 의 꿈. 그러나 우리는 또다시 '불안한 아침' 을 맞고 있네요. 정직하게 땀 흘리며 열심히 살다보면 나에게도 좋은 날이 온다는 소박한 믿음마저 깨진 채, 우리는 거리에서 직장에서 저마다 불덩어리를 품고 막막한 불안감에 짓눌리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를 알려거든 어디서 왔는지를 돌아보라고 하지요. 지금 우리가 겪는 이 삶의 충격은 근대 1백년사에서 세번째 '해체' 라고 합니다.

일제의 한일합병이 그러했고 6.25전쟁이 그러했듯 국제통화기금 (IMF) 관리체제는 한국사회를 또 하나의 커다란 단절과 질적 변화로 몰아갈 겁니다.

그 와중에서 힘없는 민초들의 한숨과 절망의 몸부림이 또 얼마일지. 길을 잃고 괴로워하는 자만이 새 길을 찾아 나서듯, 희망은 가난한 자들의 양식이기에 우리는 고통 속에서 희망을 갈구합니다.

"조만간 우리 경제가 회생하고, 내 생활은 다시 원상으로 돌아갈 거야. " "밀레니엄이라는데 새 천년을 맞으면 뭔가 좋아지겠지. " "아, 언제쯤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까. " 정말 그럴까요? 우리에게 돌아가야 할 좋은 시절이란 무엇일까요?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돌아갈만한 좋은 시절이 있었던가요?

그래도 평생직장이 보장되던 박정희 시대인가요, 경제호황으로 선진국 바람들던 전두환.노태우 시대인가요, 우리가 그토록 온 몸으로 거부하고 싸워온 그 문제투성이 사회로 원상복귀하잔 말인가요. 이른바 국난이라는 것이 닥치기 이전의 우리 사회, 우리 경제, 우리 정치, 우리 자신의 삶의 양식과 생활문화와 가치관이 우리가 돌아가야 할 원상일까요? 아닙니다.

슬프게도 우리에게는 되돌아가야 할 좋은 시절도 되돌릴 원상도 없는 겁니다.

깨진 거울조각을 붙이듯 마땅히 우리 손으로 깨뜨렸어야 할 과거를 붙들고 현실을 도피하지 말아야지요. 잘못 들어선 길은 시간이 흐를수록 되돌아 와야 할 거리가 멀어질 뿐, 하루빨리 IMF를 극복하자는 지혜는 오히려 '망국의 지혜' 가 될 수도 있는 거지요.

문제의 원인을 바로 보면 길은 의외로 가까운 데 있다고 합니다.

언제나 바깥세계의 변화속도는 우리 내부의 개혁속도보다 훨씬 빨랐고 그 '역사의 시간차이' 만큼 이런 혹독한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오늘의 사태는 지구시대의 변화에 홀로 동떨어진 남북한 분단구조의 동시파탄이자 근대화 37년의 큰 줄기인 '박정희주의' 의 파탄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자본주의체제는 그 성능과 효율성이 좋은 만큼 이를 통제할 도덕성과 사회적 안전장치가 없을 때 어떤 결과가 오는가를 뼈아프게 보여준 것이기도 합니다.

감옥에서 저는 참 이상한 걸 봤어요. 키 큰 나무들이 다 목이 부러져 있는 거예요. 이곳에 벼락맞을 사람들이 많아서 벼락이 쳐 그런가 했더니 그게 아니더라구요. 신창원이처럼 나뭇가지를 잡고 담 뛰어 넘을까봐 옆가지는 다 쳐버리는 거예요. 나무도 산 생명체인데 옆으로 뻗지를 못하니까 위로 위로만 키 높이 성장을 하는 거지요. 그러다 비바람이 치면 그만 목이 부러지거나 뿌리째 쓰러지고 마는 겁니다.

'성장' 만 있고 '성숙' 이 없으니 더 크질 못하는 거지요. 우리 역시 30년 동안 '압축 성장' 만 해오다 목이 부러지고 만 셈이지요. 지금이야말로 '압축 성숙' 이 필요할 때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소홀했던 민주주의와 사회복지, 시민운동과 노동가치, 여성권리와 자연살림, 인간성과 정신문화가치를 집중해서 키워가야 할 때인 것입니다.

지금 고통을 전담하고 있는 노동자와 서민들의 분노에 찬 가슴은 바로 이 요구가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정녕 아름다운 사회적 약속인 '고통분담' 마저 거부하는 나라 망친 이들이 책임있게 반성하고, 김대중 정부 역시 좀 더 강도 높고 좀 더 속도 있는 개혁을 가해야만 희망의 뿌리가 살아날 수 있다는 하늘 같은 민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쉽사리 희망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이 아니라 정직한 절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실 변화에서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신뢰를 잃어버렸는지, 우리가 얼마나 부실하고 자기 실력이 없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면서 철저하게 절망하고 또 절망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사이비 희망과 타협하지 않는 것, 희망의 거품을 씻어내는 것. 그리하여 저의 '희망찾기' 는 사실상 희망 버리기이고 오히려 절망 껴안기입니다.

한번은 치열하게 자기부정을 치른 사람만이 참된 자신을 세울 수 있듯이, 정직하게 절망의 심연에 도달한 사람만이 희망의 문을 향해 새벽처럼 솟아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가?

봄은 추운 겨울이 다 지나간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한 겨울 몸 속에서 이미 자라나 있습니다.

희망은 절망의 몸 깊은 곳,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기본부터 시작하는 고통의 한가운데서 잉태되어 나는 것임을 저는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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