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금융위기서 가장 빨리 일어서는 ‘놀라운 한국’ 세 가지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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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피지수 1651.7, 2분기 성장률(전 분기 대비) 2.6%, 올해 경상수지 흑자 261억5000만 달러, 신용등급 전망 상향….

금융위기 1년, 한국 경제가 또다시 극적으로 위기를 극복해 내고 있다. 주식시장엔 외국인 투자자가 밀려오고 있고, 성장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제일 높다. 일자리가 여전히 부족하고, 민간 투자가 예전 같지 않다는 아쉬움은 크지만 위기 탈출 속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꼭 1년 전인 2008년 9월 15일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점화된 금융위기가 덮쳐왔을 때 한국 경제가 이토록 빨리 기운을 찾을 것으로 누가 생각했을까. 한국의 위기 탈출 스토리는 국제통화기금(IMF)이나 OECD 같은 국제기구 전문가들도 입을 딱 벌릴 정도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 내부에 부실이 쌓였던 외환위기 때와 달리 이번엔 위기의 진원지가 미국 등 해외였고, 한국 기업과 금융이 건실했다. 수출기업들이 환율 효과를 톡톡히 누리는 측면도 있다.

그중 꼭 새기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정치 시스템과 리더십이 제대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여야는 사사건건 대립하면서도 지난해 겨울 20조원이 넘는 감세안을 통과시켰다. 올 4월엔 28조원의 사상 최대 추경안을 합의처리했다. 여야 대립으로 금융개혁법 하나 처리하지 못해 외환위기를 자초했던 10여 년 전과는 사뭇 달랐다. 강만수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은 “한국의 재정지출 확대 정책 시행은 어떤 나라보다 빨랐다”면서 “협조해 준 정치권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예산을 현장에 빨리 내려 보내기 위해 ‘속도전’에 올인했던 정부의 기민함도 한몫 했다.

경제 외교는 위기의 순간에 빛났다. 지난해 10월 위태롭던 외환시장의 불안을 한방에 잠재운 것은 ‘달러 파이프 라인’의 확보로 평가된 한·미 통화 스와프(300억 달러)의 성사였다. 뒤이어 중국·일본과의 600억 달러 통화 스와프는 외환시장에 이중·삼중의 안전장치가 됐다. 외환위기 때도 정부는 필사적으로 매달렸지만 미·중·일은 야멸차게 외면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IMF 구제자금을 받으라며 한국의 등을 떼밀었다.

기업 지원 프로그램도 성공적이었다. 논란이 많았지만, 부실은 무조건 빨리 도려내는 게 좋다는 식의 수술 만능주의에는 얽매이지 않았다. 대신 ‘한국식 구조조정’을 택했다. 위기가 진정될 때까지 일단 살려낸 뒤 옥석을 가려내는 방식이었다. 금융당국은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을 매일 챙겼고, 신용보증을 연장했다. 한 금융계 고위 인사는 “위기만 넘기고 나면 또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판단해 지원해 준 것이 주효했다”면서 “기업들이 버텨낸 덕분에 외환위기 때와 같은 대량 해고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물론 후유증은 남아있다. 빚을 내 경기부양책에 쏟아 부은 탓에 재정건전성이 많이 나빠졌다. 나라 빚은 1년 사이 57조원이나 늘어 올해 국가채무는 국내총생산(GDP)의 35.6%인 366조원이다. 중산층에서 빈곤층으로 떨어진 이들도 많다. 경제가 회복된다고는 하지만 ‘고용 없는 성장’은 개선될 기미가 없다. 금융 시스템과 외환 제도 정비도 숙제로 남아있다.

사실 한국 같은 소규모 개방경제는 바깥에서 탈이 나면 언제라도 위기를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경제 체질이 탄탄하고, 정치와 사회 시스템이 건강하게 돌아가기만 하면 겁날 게 없다. 대공황에 버금가는 위기라고 했던 글로벌 금융위기 1년이 그걸 말하고 있다.

이상렬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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