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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익성 나빠진 은행들, 가계대출로 ‘구멍’ 메우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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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호 09면

중견기업에 다니는 이모(43)씨는 최근 은행 콜센터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마이너스 통장 대출을 연장하려면 금리를 연 9%에서 9.5%로 올려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씨가 “1년 전보다 금리가 많이 떨어졌는데 무슨 소리냐”고 따졌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직원은 “아시다시피 요즘 시중금리가 오르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대출을 받을 건지 말 건지를 결정하라고 했다. 당장 돈이 필요한 이씨로선 은행 측이 제시한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저금리시대에 은행 대출이자 더 높아진 까닭은

최근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 등 은행의 주요 가계대출 금리가 일제히 오르고 있다. 올 6~7월 연 2.41%까지 떨어졌던 91일 만기 양도성예금(CD) 금리가 지난달 초부터 반등하는 등 시중금리가 오름세를 타고 있어서라는 게 은행들의 설명이다. 하지만 고객들에겐 핑계로 들릴 뿐이다. 은행의 대출금리가 시중금리보다 더 많이 올랐기 때문이다. “시중금리가 떨어질 땐 대출금리를 찔끔 내리더니 반대가 되자 재빨리 금리를 올린다”는 게 이씨 같은 금융소비자들의 불만이다.

신용대출 이자 연 14%까지 받기도
A은행의 개인 신용대출 평균 금리는 요즘 두 자릿수를 넘어섰다. 10단계로 나뉘어 있는 신용 기준에서 최상위인 1단계 고객에 대해선 연 8%를, 대출 가능 최저 기준인 8단계 고객에겐 14%를 물린다. 고금리였던 1년 전과 비슷한 수준이다. “직장이 바뀌거나 한두 번 연체라도 한 고객은 오히려 금리가 올랐기 십상”이라는 게 창구직원들의 전언이다. 가계대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주택담보대출도 마찬가지다. 국민은행은 14일부터 금리 변동형 신규 대출에 연 4.54~6.14%의 금리를 적용한다. 다른 은행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달여 전에 견줘 금리가 많게는 0.5%포인트까지 치솟았다. 같은 기간의 금리 상승폭을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은행에 예금할 때의 금리와 대출받을 때의 금리 차이(예대금리 차)도 확대되고 있다. 지난해 1.48%포인트에서 올 7월엔 2.53%포인트로 커졌다. 1999년 이후 10년 만에 가장 높다. 그만큼 은행이 고객에게서 챙겨가는 돈이 많아졌다는 의미다.

한 술 더 떠 은행들은 금리가 오를 때와 내릴 때 다른 태도를 보이기 일쑤다. 회사원 김모(39)씨에게 저금리는 남의 얘기다. 지난해 10월 신용대출을 받은 뒤 계속 연 13%의 금리를 물고 있다. 금리가 떨어지는 동안 은행에선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그러다 김씨가 얼마 전 만기 연장을 위해 창구를 찾아가자 연장 수수료를 포함해 금리를 0.7%포인트 올려달라고 했다. 지난해 9월 세계 금융위기가 본격화한 뒤 한국은행 기준금리는 다섯 달 만에 3.25%포인트 하락했다. CD금리는 이보다 더 많이 떨어졌다. 이에 비해 한은이 집계하는 은행의 가계대출 가중평균 금리는 2.5%포인트가량 떨어지는 데 그쳤다. 가계 대출 대부분이 변동금리로 이뤄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금리 인하의 과실 중 상당 부분을 은행이 챙겼다고 볼 수 있다.

배보다 더 큰 배꼽, 가산금리
이런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는 게 가산금리 추이다. 가산금리는 은행이 조달금리에 각종 비용과 이윤(마진)을 계산해 추가하는 금리다. 대출금리에서 조달금리를 빼면 간단히 계산할 수 있다. 한 시중은행의 내부자료에 따르면 신용대출의 최저 가산금리는 지난해 9월 2.68%에서 이달 11일 3.63%로 급등했다. 신용도가 낮은 고객이 부담하는 최고 가산금리는 이보다 더 뛰었다. 조달금리보다 가산금리가 더 높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구조가 된 것이다. 가산금리가 집중적으로 오른 시기는 CD금리가 가파르게 떨어지던 지난해 연말에서 올해 초였다.

이 은행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금융연구원은 최근 은행권의 신규 대출 가산금리가 7월 말 평균 3.12%로 올 들어 두 배 가까이로 뛰었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신규 대출과 기존 대출을 모두 포함하는 금융감독원 통계로도 지난해 10월 1.5%였던 가산금리가 올 7월 말 2.53%까지 수직 상승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대출금리의 기준이 되는 CD 발행엔 금리를 뺀 다른 비용은 거의 들지 않는다”며 “가산금리가 오른 만큼 은행들의 수익이 늘어났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한은에 따르면 올 7월 재개발·재건축 등을 대상으로 하는 집단대출 금리가 연 4.79%를 기록해 CD금리보다 2.38%포인트 높았다. 이는 2004년 통계를 집계한 이후 최대다. 두 금리 간의 차이는 지난해 10월까지만 해도 1%포인트 아래에 머물렀다. 이 때문에 CD금리가 하락해도 집단대출 금리가 오르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은행이 고시하는 대출금리와 창구에서 실제 받을 수 있는 금리와의 격차도 커지고 있다. 고객을 끌기 위해 고시금리는 최저치를 제공한 뒤 창구에서 이런저런 가산금리를 붙이기 때문이다. 주택금융공사는 올 6월 말 국민·신한·우리·하나·SC제일 등 5개 시중은행 창구를 직접 방문해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조사했다. 고시금리는 2%대였지만 평균적인 직장인이 만기 10년짜리 변동금리 주택담보대출을 받으려면 많게는 3.27%포인트까지 이자를 추가로 더 물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대금리 차 10년 만에 최고
은행들도 할 말은 있다. 금융위기 이후 수익성이 크게 떨어져 건전성을 위협받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신규 대출만 보면 은행 몫이 많아지고 있지만 기존 대출까지 따져보면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은행권은 1분기에 큰 폭의 적자를 보고 2분기엔 가까스로 흑자를 기록했다. 은행 수익(순이자 마진)은 2005년 말 2.81%포인트에서 지난 6월 말 1.85%포인트까지 줄었다. 대출금리가 높아졌다고 고객들이 아우성을 쳐도 은행들이 “남는 게 없다”며 아랑곳하지 않는 이유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대출금리의 기준이 되는 CD금리와 은행들이 실제 조달하는 금리 간의 차이가 커졌기 때문이다. 자금조달원 중 CD보다 비중이 큰 은행채는 현재 CD에 비해 1.4%포인트가량 금리가 높다. 금리가 뛰던 지난해 이맘때 최고 7%의 고금리를 내걸고 유치한 특판예금이 많은 것도 부담이다. 이 두 가지 상품이 은행의 자금 조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0%가 넘는다. 은행 입장에선 “CD를 통한 조달 비중이 미미한데도 대출의 대부분이 여기에 물려 있어 수익성이 떨어지고, 그러다 보니 가산금리를 높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수익원이 급속히 사라진 것도 은행들이 가계대출 금리를 높이는 요인이다. 서울 여의도의 한 은행 지점장은 요즘 바깥 나들이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1년 전만 해도 여의도는 물론이고 영등포와 구로까지 고객을 찾아 돌아다니곤 했었다.

“갈 데가 없다”는 게 그의 말이다. 자금이 풍부한 대기업은 대출을 받지 않은 지 오래 됐다. 중소기업 대출은 계륵이다. 자금 수요는 많지만 떼일 가능성도 크다. 줄이고 싶지만 마음대로 안 된다. 대출을 확대하고 금리도 높게 받지 말라고 정부가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은행 관계자는 “중소기업들이 대기업보다 이자를 적게 내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한때 유행하던 투자은행(IB) 분야는 은행들의 기피 대상 1순위가 됐다. 주로 투자했던 해외파생상품 시장이 무너진 뒤엔 손해를 적게 보고 기존에 투자한 돈을 회수하는 게 지상목표다.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이 지난주 금융위원회에서 직무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은 것도 이런 상품의 한 종류인 부채담보부증권(CDO)에 투자했다가 막대한 손실을 봤기 때문이다. 결국 은행이 돈을 굴릴 수 있는 건 가계대출뿐이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은행 전체의 목표 수익률은 정해져 있는데 움치고 뛸 곳이 없다 보니 가계대출의 가산금리를 조금 높이고 있다”며 “돈을 벌어야 하는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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