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인터뷰] 폰 바이츠제커 前독일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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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79) 독일 전 대통령은 전직 국가원수로서의 바람직한 역할이 무엇인지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지도자다.

그래서 요즘도 정파나 종교.인종을 초월해 독일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는 퇴임 이후 지금까지 한가한 휴식을 거부한 채 한달평균 보름 이상 강연이나 외국 출장 등으로 집을 비운다.

크리스챤 아카데미가 19일 서울에서 개최하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동북아시아 국제평화회의' 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 방문길에 나선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을 방한에 앞서 18일 일본 오사카 (大阪)에서 만났다.

[만난사람= 유권하 기자]

- 코소보사태가 국제적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민간인들의 인명피해가 늘면서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 도 계속되는 공습에 심리적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 공습으로 문제를 조기 해결하려는 당초 기대가 결국 깨져버린 셈인가.

"평화의 전제조건은 전쟁의 종식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인권 등이 보장돼야 한다. 또 폭력.빈곤.기아 등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는 이번 사태에서 아무리 상황이 어렵더라도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가 단지 적절한 수단으로서만 추구돼야 한다는 교훈을 배워야 한다. "

- 올해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10년째다. 지나온 독일 통일과정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전반적으로 옳은 방향으로 진행됐다. 동.서독간의 정치.경제적 통합과정은 성공적으로 완수됐다고 본다. 두 지역간 평등한 사회적인 삶의 기회가 마련됐으며 주민들간의 인간적 상호이해도 점차 자리잡고 있다. 완전한 내적 통합은 짧은 시일 안에 해결될 과제가 아니다. 통일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시행착오는 불가피했다. 후회되는 것은 갑작스런 통일을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기에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

- 한반도는 독일과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조언이나 충고를 사양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또 한국에 주는 가장 중요한 시사점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분단 독일에서는 장벽과 동독 당국의 검열에도 불구하고 편지교류, 상대편 방송청취, 제한된 상호방문까지도 가능했다는 점이 한반도와는 매우 다른 차이점이다. 이처럼 독일인들은 단절없이 서로 최소한의 정보교류를 하며 상호이해와 불신의 벽을 허물어 왔다. 독일의 경험에서 보듯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해선 상호관계를 꾸준히 이어가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

- 한반도의 통일은 가능하다고 보는가.

"통일이 올 것을 예견했던 독일인은 거의 없었다. 나 역시 생전에 통일을 보지 못할 것으로 여겼다. 그렇지만 통일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르게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

-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지역의 평화정착을 위한 주변상황은 어떤가.

"4대 강국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아시아의 맹주로 자처하는 중국이 서서히 부상하고 있다. 물론 러시아 역시 동북아 지역문제에서 소외되길 원치 않는다. 냉전시기 지역 안보를 책임졌던 미국은 이제 동북아 지역의 후견자 역할에서 파트너의 입장으로 바뀌고 있다.

이처럼 힘의 역학관계가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기에 평화정착을 위한 연착륙 정책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가장 큰 골칫거리는 지역안보에 위협을 주는 북한문제다. 그러나 기근에 시달리는 북한을 인도적 차원에서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지역안보에 보탬이 되리라 본다. "

- 한국정부가 추진하는 소위 '햇볕정책' 이란 대북한 정경분리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매우 중요하고 시의적절한 선택이라고 확신한다. 현재로선 다른 대안을 생각해 볼 수 없다. 대북 정책에 있어 팔짱을 끼고 관망하는 소극적인 자세로는 북한의 고립상태와 주민들의 고통을 더 연장시킬 뿐이다. 따라서 햇볕정책에 거는 기대가 남다르며 큰 성과를 거둘 것으로 믿는다. "

- 빌리 브란트 전 독일총리가 주창해온 '동방정책 (Ost - Politik)' 이 일부에서 비난을 받았듯 '햇볕정책' 이 오히려 호전적인 북한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보탬을 준다는 비판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동방정책을 지지했지만 서독정부도 통일정책 추진과정에서 그런 비난에 많이 부닥쳤다. 물론 동독에 대한 지원정책이 공산주의 정권의 체제강화나 안정에 도움을 줄 위험성에 대해서는 항시 예의주시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동독정권과의 교섭을 통해 긴장완화 정책이야말로 결국 동독체제를 강화시킨다기보다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품 안으로 적극 끌어들이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게 됐다. "

- 현재 한국에서는 지역갈등 문제로 국가의 내적 통합에 진통을 겪고 있다.

독일의 경우도 남북간 갈등, 통일 이후 동.서독간의 지역갈등이 적지 않았는데 이를 어떻게 극복했나.

"통일 이전 독일 내에서는 경제력의 차이에 따른 일종의 지역간 긴장관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막강한 남부지역과 그렇지 못한 북부지역간의 문제였다. 그러나 독일은 연방의 재정균형제도가 잘 정착돼 있어 재정 흑자를 내는 주가 적자를 내는 주를 도우면서 지역간 격차를 해소하고 있다. 물론 통일 이후 동.서독 지역간 갈등해소는 하루아침에 해결될 과제가 아니지만 지난 10년간 상당부분 해소됐다고 본다. "

- IMF 구제금융을 받은 한국에서는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탓에 최근 실업자가 급증하는 등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의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래서 문제 해결책을 최근 앤서니 기든스가 주창하고 있는 제3의 길에서 찾기도 한다. 제3의 길이 한국적 상황에도 적용 가능한가.

"기든스의 주장은 상당 부분 설득력이 있지만 영국적 상황에 한정돼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의 논리를 유럽이나 다른 나라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다. "

- 한국에서는 최근 고위 공직자의 집에서 거액의 현금을 털었다는 한 절도범의 폭로가 정치 쟁점화되고 있다. 공직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무엇인가.

"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한 가장 중요한 덕목중 하나가 정치인과 정부 관리의 청렴성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신뢰와 믿음을 먹고 산다. 만약 국민이 정치인이나 관리를 불신하게 될 때 민주주의는 큰 손상을 받게 될 것이다. "

- 바람직한 전직 대통령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재임시의 경험을 토대로 도움을 청하는 곳이 있다면 나서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나 후임자의 국사에 대해 시시콜콜 간섭해서는 안된다.

특히 특정 정파나 정당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중립적인 입장에 서야 한다.

내 개인적으로는 독일통일.유럽통합과 관련한 외부 강연과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평균 한달에 보름 정도는 국내 및 해외출장을 다닌다. 이밖에 유엔의 내부개혁 작업과 향후 12개월간 독일의 안보문제와 관련된 특별위원회 일에 참여하고 있다. "

- 다가오는 새 천년에 예상되는 전지구적인 도전 과제는 무엇인가.

"새 천년의 시작과 함께 정보기술.학문.자본 등 대부분의 영역에서 국경이라는 개념은 사라질 것이다. 반면 그렇지 못한 부분으로서는 일련의 사회적 규범과 인간 상호간의 행동양식을 들 수 있다. 밀레니엄을 맞아 인간적 한계를 인식하고 사회적 정의를 중시하는 발상을 배우려는 자세야말로 전지구적으로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과제라고 본다."

◇바이츠제커는…

바이츠제커가 10년간 (84~94년) 의 대통령 임기를 마쳤을때 평소 찬사에 인색한 독일의 언론들 조차 그를 '국민의 관심과 의지를 결집시키고 높은 차원의 정치를 구현했던 지도자' 라고 평가했다.

연방의회 부의장.베를린 시장을 거쳐 대통령직에 오른 바이츠제커는 독일의 귀족가문인 폰 바이츠제커가 (家) 출신. 할아버지는 주지사, 아버지는 외무차관을 지냈으며 형인 카를 프리드리히는 당대의 물리학자이자 철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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